교실에 꼭 있는 학생들
교실에 꼭 있는 학생들
-여러가지 색깔의 파레트처럼
세룰리안블루, 코발트블루, 티파니블루, 울트라마린, 프러시안블루. 모두 블루계열의 색 이름이다. 꼭 블루뿐만 아니라 레드계열, 옐로우계열, 그린계열 등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의 파레트처럼 색깔의 개수는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만큼 이름도 다양하다. 글을 쓸 때 단순히 파랑색이라고 하지 않고 코발트블루색이란 식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좀 더 생생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가능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교육도 이와 같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실 안에는 적게는 10명 내외에서 30여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함께 모여 있다.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모두 다르다. 그런데 학교의 교육은 대량생산체제의 시작과 함께 획일적인 인재 육성에 집중해왔다. 매년 초겨울이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미명 아래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객관식 시험을 치르고 1등부터 꼴지까지 등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한다. 그 결과 상위권에서 밀린 대다수의 학생들은 열패감과 좌절감을 무의식중에 차곡차곡 쌓아왔고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지도층과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키워왔다.
작은 사회라고 불리는 교실 안도 다르지 않다. 수시로 치르는 단원평가, 중간/기말고사, 내신 성적 등으로 줄 세우고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직후 사회를 복원하고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인재 양성에 집중해왔다면 이제는 좀 더 다른 시선으로 교육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건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건강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모두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낼 수 있는 교육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내가 맡은 학급을 돌이켜보면 학생들은 정말 다양하다. 역사나 과학 등 관심 있는 교과에 대한 탐구심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소위 영재아 같았던 학생은 쉽게 다른 학생의 원성을 듣는 분위기가 있었다. 원리원칙주의적인 학생은 융통성이 부족하단 이유로 쉽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소위 힘 좀 쓰고 껄렁거리는 학생은 자신보다 약하고 부족한 학생을 대놓고 또는 지능적으로 은밀하게 괴롭히곤 했다. 다문화 학생이나 가정에서 케어가 부족해 외모가 볼품없거나 신경 쓰지 못하는 학생은 쉽게 배척을 받고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똘똘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도 어김없이 비난을 받곤 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아량, 수용적인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어디 한 번 걸려봐라는 심정으로 비판 거리를 찾는 하이에나들처럼 집요하게 굴었다.
살다보면 조금 느린 학생도 있고 반대로 빠른 학생도 있고 결벽증 정도로 청결한 학생이 있는 반면 약간의 얼룩은 신경 쓰지 않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축구를 잘하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글을 잘 쓰는 학생이 있고 노래를 잘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왜 모든 학생들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여 일직선에 세우려고 하는 걸까. 아마 그 밑바탕에는 시험성적으로 서열화하는 좋은 대학, 근사한 직장에 입성해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계산심리로 더 몰아붙이는 게 있을 것이다.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처럼 사람을 계층화하고 구별 짓는 심리는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라는 그릇된 낙인까지 심어주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결국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한 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처럼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관점을 바꿔서 어려서부터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해주고 그 아이만의 꿈을 그려나갈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남과 비교하여 좌절할 이유도, 끌어내리며 모함하는 일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색깔의 파레트처럼 우리 학생들에게도 콕 집어 각각의 고유 이름과 개성에 어울리는 교육이 이루어져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