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수업] 쉽다고 쉬운 게 아니야
이렇게 쉬운걸 40분 동안 가르치라고 ?
5학년 수학교과서에 있는 소수x자연수 차시는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교과서에는 '0.5L 짜리 물을 3병 마신 힘찬이는 총 몇L를 마셨냐'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너무 쉽다. 애들은 교사의 설명 따윈 필요없는 듯 연필부터 들어서 풀어버리고, 교사는 머쓱해하며 이 문제를 가지고 40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혹자는 감축 운영을 통해 진도를 조금 더 뺄 수도 있을 것이고, 다음 차시와 통합해 수업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이들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는 교사가 쉽게 넘겨도 되는 것일까?
수학은 위계의 학문
교과서는 위계에 따라 차시가 배정되어 있다. 수학의 특성을 살려 사고력을 높이기 위한 수업을 하려면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도 배움의 순서를 알아야 한다. 직육면체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배운 뒤에 원기둥의 부피를 배우는 이유는 '직육면체 부피 구하는 방식'으로 원기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인데, 학생들은 과연 이것을 알고 넘어가는가? 아니면 직육면체의 부피 구하는 것과 원기둥의 부피를 구하는 것을 별개의 과제로 생각하고 각각의 공식만을 외워 문제를 푸는가? 교사는 배움의 순서를 서로 연결하지 못하고 수학적 식물인간이 되어가는 학생들에게 개념이 공식으로 발전하는 형식화의 과정을 학생이 스스로 깨닫고 사고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0.5 x 3 을 표현하는 방식을 4가지 이상 생각하기
이를 깨닫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최대한 많은 방법' 구하기다. 아래에 아이들이 구한 방법을 순서대로 잘 배열해보면 수학이 발전해 온 과정을 아이들이 '소수의 곱셈'이란 소재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각 모둠에서 0.5X3을 풀 수 있는 방법을 4개 이상 찾으라고 했다. 보통 5~6개를 찾는다. 원리 면에서 거의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초등학생의 수준을 고려하면 각기 다른 방법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의 수준에서 각기 다른 방식의 방법 중 괜찮은 것들을 모아서 아래 사진처럼 정렬해보았다.
1) 그림이나 수직선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뇌 발달에 좋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숫자나 글자가 없던 시절의 사람은 '그림'으로 소통하고 사고를 발전시켰을 것이다. 2) 덧셈과 곱셈. 수학의 가장 기초. 덧셈의 불편함이 곱셈으로 발전했다. 수학은 추상의 발전이다. 3) 소수를 분수로 바꾸기.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이다. 위계를 따지는 수학의 특성상, 소수를 분수로 바꾸는 방법을 앞 차시에서 배웠기 때문에, 이 방법을 이용하면 소수X자연수의 소숫점 찍는 알고리즘을 배우지 않고도 답을 풀 수 있어야 한다. 분명 우리반 25명이 모두 이 차시부터 배웠는데도, 이 방법을 떠올리는 학생은 반에서 3~4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앞 차시와 연결해 오늘 배울 내용을 생각해 내는 것은 상당히 깊고 까다로운 생각 과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원과EBS에서, 혹은 아이XXX 홈0에서 4번만 열심히 배워 오니 이 과정을 생각해 볼 기회는 전혀 없다. 4) 형식화, 가장 간단하면서 마지막 단계. 세로셈을 배우는 단계다. |
아이들이 생각한 4가지 방법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순서에 맞게 배열하면서 수학자들도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알려준다. 우리가 쓰는 손 쉬운 소수의 곱셈 계산법은, 덧셈이란 기호가 불편해서 곱셈이란 약속을 만들고, 이 곱셈을 자연수가 아닌 분수에 적용해보고, 분수가 불편해서 소수를 만들었으며, 그래서 소수의 곱셈은 분수의 곱셈으로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앞으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이 과정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국 수학 교육에 녹아있는 우리 사회의 병폐
아이들은 1~3번의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4번만 기억한다. 일부 학원과 학교는 1번이 어떻게 4번으로 이어졌는지를 가르치지 않고, 4번만 보기 좋게 정리해서 아이들에게 공급해준다. '당신의 아이가 수학을 못하는 진짜 이유'의 저자 박영훈 씨는 생각하지 않은 지식을 잘게 짤라 먹이처럼 주는 이런 교육을 '암죽식 교육'이라 표현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방법을 알 수 있기에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학생들. 이 메카니즘 속에서 교육받고 양성된 자 중 가장 심각한 피해자는 어쩌면 교사일지도 모른다.
한국 교육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한국 학교, 그 학교 안에 각각의 교실에서는 수많은 문화가 파생, 생성된다. 제도가 압박하고 이에 교실이 응하여 만들어내는 경쟁과 속도전의 문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교육. 그 교육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 일부가 바로 교사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결과만을 향해 달려온 우리 교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한 부진아를 생각하며
이 쉬운 문제도 못 푸는 학생을 위해, 또 쉽다고 생각해 소홀하게 넘어가는 보통의 학생들을 위해서 이 수업은 '쉬운 것을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쉬운 문제를 쉽게 넘기지 말자. 최대한 많은 방법을 생각하게 하자. 아무리 단순한 생각이라도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해주자. 그 과정 하나 하나가 모두 우리가 배우는 수학의 기초이고 뿌리였음을 기억하게 하자. 수학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는 것, 수학 부진아였던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