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기분] - ep2 노예근성
아이들은 참 신기하다. 세월이 지나도 비슷한 모습이다. 특히 남녀관계는 더 그렇다. 저학년 시기에는 남녀의 구분이 잘 없다. 그저 옷색깔과 머리길이만 다를 뿐이다. 세월이 흘렀다 해도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이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적대심따윈 없다. 여학생들이 조금 의식이 빠를 뿐이다.
중학년이 되면 점차 이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 때는 '모'아니면 '도'다. 운 좋게 남녀 사이에 서열정리가 되면 -주로 여학생들이 우위에 오른다- 서로 잘 어울리며 논다. 소꿉놀이를 하는 듯하다가도 미친듯이 싸우기도 한다. 고학년이 되면 이제 남자와 여자가 된다.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여친, 남친이 생기기도 하고, 아이돌에 의해서 눈이 높아져 학급의 이성이 안중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쉬는 시간, 교실을 무심히 바라본다. 교사로써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 지, 교우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 지 살펴보기 좋은 시간이다. 그렇게 전지적 방관자 시점으로 아이들의 휴식시간을 지켜본다. 혼자 책을 읽기도 하고, 시끌벅적 장난을 치기도 한다. 뭐가 좋은 지 작은 움직임에도 까르르 거린다. 교실 한켠에 혼자 남겨진 아이가 보인다.
교우관계에 특별한 문제는 없는 데 아이들이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 아이는 홀로 창밖을 보고 있다. 아직 한창 어린 아이가 저런 수심깊은 얼굴을 하는가 싶다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어쩜 그런 모습이 신비하게도 느껴진다. 갑자기 아이의 얼굴이 찡그러진다. 옆에 남녀섞인 한 무리의 웃음소리가 너무 왁자지껄했나보다. 한 남자아이가 재롱을 떨고 있었고 주변에 아이들은 그 모습을 깔깔깔 즐겁게 보고 있었다.
그 해 봄이 미쳐 지나가지도 못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의 직장과 가까운 경기도로 이사를 갔다. 오래된 빌라에 살다가 새 아파트에 살게 된다는 소식에 전학이 뭔지도 모른 채 기뻐했다. 형과 다른 방을 쓰게 된다는 것도 큰 기대였다. 그렇게 3학년 새학기 시작하자 전학을 갔다. 친구들하고 친해지기도 전이라 별 탈없이 옮겼던 것 같다.
새 학교는 신도시의 개교한 초등학교였다. 당시 느낌 새거라는 산뜻함보다 정리가 안된 불안감이 더 컸었다. 학교의 한 켠은 아직 공사가 덜 끝나 있었다. 교실 안은 더 혼란했다. 입주가 시작되어서 전학생이 워낙 많을 시기였다. 매우 어수선했다. 하지만 모나지 않은 성격 탓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금방 친한 친구가 생겼고 어울려 다녔다.
평화로웠던 우리반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왔다. 귀티나는 여학생이었다. 어디서 전학 온지는 기억은 안난다. 당시 기억으로 우리 동내에서 가장 큰 아파트에 살았고, 돈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물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으나 또래에 비해서 덩치가 컸다. 패션에 대해 몰랐어도 비싸고 화려한 옷을 걸치고 다녔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우리반을 순식간에 휘어 잡았다. 여자 아이들은 서로 그 친구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우리반은 그와 친한 아이, 아니 그가 놀아주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로 나뉘게 되었다. 우리 반 남자아이들에게는 매섭게 굴거나 지나치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생각 없는 남자 녀석들은 어느 덧 그의 노예가 되었다.
한 날은 점심을 먹다가 그가 물을 쏟았다. 양말이 물에 젖었다. 그는 연습장을 찢어 자신의 집 주소를 적었다. 그리곤 나에게 집에 가서 양말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선생님 몰래 놀이시간에 미친듯이 그의 집으로 뛰어 갔고 양말을 받아왔다. 그 아이의 엄마도 언제나 그랬다는 듯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무심하게 양말을 건내주었다.
꼬마의 어린 사랑은 아니었다. 절대 이성으로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 때는 그런 것도 몰랐다. 돌이켜 이상한 점은 왜 그때는 아무 의문을 품지 않았는 것이다. 지금도 모르겠다. 남자 아이들을 거의 애완동물 다루듯이 했다. 넌 강아지, 넌 고양이, 넌 토끼 이렇게 정해줬고 수신호에 맞춰 애교를 부려야 했다. 맞다. 난 개구리었다. 그래서 지금도 ID가 frog로 시작된다.
그런 시간의 평화는 특정 집단만의 것이었다. 그 사이 우리 반은 패가 갈렸다. 다혜를 시기하는 아이들의 반란이 이어졌다. 그는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과 이야기 하면 내 친구가 아니라 선언했다. 그리고 뚱뚱한 아이,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아이, 삐적 마른 아이들을 한 명씩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괴롭힘 받는 아이들을 도와주지도 다혜와 한통 속이 되어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냥 내 삶의 걸림돌이 아니라며 방관하며 살았다. 어린 나이에 방관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을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불편했을 뿐이다.
교실은 결국 일이 터졌다. 그의 생일이 되었고 나름 성대한 생일파티가 열렸다. 그 곳에 참여하게 되는 '인싸'와 초대장을 받지 못한 '아싸'가 명확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었던 회색분자였던 나는 맛있는 것을 준다는 이야기에 혹해서 넘어간 상태였다. 하교 직전 짝꿍에게 쪽지를 받았다.
"넌 우리편이지? 그럼 생일파티에 가지마"
나는 또 다시 대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저 그런 방관자의 모습으로 헤어졌다. 그냥 그가 시킨 것만 하면 불편할 게 없었기 때문에 굳이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훗 날 건너 건너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고학년이 되고 그동안 괴롭힘받았던 아이들에게 복수로 심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중학교까지 이어졌고 결국 자퇴를 했다고 전해들었다.
정말 궁금하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는 왜 그랬을까?
그의 부모님은 왜 그랬을까?
세상은 역시 돈과 권력이었던 것일까? 그 것이 4학년짜리 어린 아이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 의심없이 그 권력에 복종했던 어린 나는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힘있는 자 곁에서 안정을 느끼는 노예근성이 자라고 있었나보다.
아직도 집에 가면 내가 재롱을 떨고 있는 그 사진이 있다. 모자를 뒤집어 쓴 채 혓바닥을 내밀고 있다. 손은 일어서 있는 강아지 마냥 손목에 힘을 뺀채 가슴에 붙어있다. 표정은 웃고 있다. 사진 속에는 내 모습만 나오지만 그 뒤쪽으로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나에게는 보인다. 그리고 필카밖에 없던 그 시절에 그 아이의 엄마가 사진을 찍어주셨다.
당시는 상처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훗날 그 사진을 돌아켜 봤을 때 사진 속 나의 어리석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오염된 기억일 수 있는 그 날의 재롱이다. 그냥 잊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깨닫게 되어버렸다. 그 후로 사람들 앞에 설 때면 문득 그 날이 떠오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설때마다 이런 의심이 들고는 한다.
날 보고 웃고 있는 저들의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