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엄마가 있다 - 여자는 어려워
엄마.
내가 남자 선생님이라 분명 좋은 것도 있는 데 가끔은 힘들 때가 있어.
바로 오늘 같은 날이야.
수학여행을 갔어.
이 경주는 몇 번째 오는 건지.
이제는 내가 문화재 해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지겨워도 아이들은 처음이니까.
모두들 잔뜩 들뜬 마음이 멀미와 피로로 바뀌어 갈 때쯤 우린 숙소에 도착했어.
벌써부터 서로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어.
원래 아이들하고 학교 밖에 나오면 신경이 곤두 서거든.
아이들을 교육팀에게 부탁하고 나서야 잠깐 쉴 짬이 났어.
강당에서 아이들이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교사 숙소 배정을 받았어.
이때부터 뭔가 찜찜함을 느꼈어.
보통 남자 교사 방 여자 교사 방을 따로 주는 데 여기는 한방을 줬어.
아 물론 아파트처럼 화장실 하나에 거실 하나 방 두 개 달린 곳으로.
하아. 이건 아닌 것 같았어.
작년에 계약했을 때 분명히 이야기했을 테고 수학여행을 처음 받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방 두 개를 이야기해서 방 두 개인 방을 줬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
맞아 누굴 탓하고 화를 내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우리는 같이 잘 수 없으니 다른 방을 달라는 요청에 숙소의 방이 다 찼으니 인근 숙박업소의 방을 잡아줬어.
걸어서 5분 거리야. 교사가 아이들과 다른 건물에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렇다고 성인 남녀 같이 쓸 수도 없고. 결국 교육팀 지도자 알바들의 휴식공간에서 자는 걸로 결론 내렸어.
속상해하지 마 어차피 밤에 잠도 잘 못 자.
혹자들이 애들 재워놓도 교사들이 술 먹고 논다고 하는 데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힘도 없어.
아이들이 신났다는 건 그만큼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 거니까.
대신 교사 본부를 아까 그 큰방으로 했어.
아이들 방과 같은 층에 있었거든.
본부라고 뭐 거창한 거는 아니야.
그냥 선생님과 비상약이 항시 있는 열린 방이야.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오라는 의미지.
저녁을 먹고 쉬는 시간에 교사 본부에 모두 앉아 있었는 데 문밖에서 우리 반 여학생 하나가 기웃기웃거렸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장난치는 가 했다가 또 오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아니래.
괜찮다고 들어오라고 해도 아니래.
선생님이 필요하냐고 해도 아니래.
혹 해서 내가 잠시 나가봤더니 휑하고 사라졌어.
복도에 잠시 나가보니 다들 신났어.
지도자 선생님(옛날 말로 수련회 교관)들에게 호기심을 갖는 아이들,
집에서는 안 하던 방청소를 다하는 아이들,
동물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
조금 이따 선보일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아이들,
들뜬 아이들 사이로 혹시 몸상태가 불편한 아이가 있는지 살펴보았어.
밤새 안 자고 놀 거라고 으름장 놓은 아이와 한바탕 장난을 치고 나서야 교사 본부로 돌아왔어.
본부에서 아까 그 여학생이 나왔어. 왜?라고 묻는 말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또 후다닥 사라져 버렸어.
혹시 무슨 일 있는 가 싶어서 여선생님께 여쭤봤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이 생리대를 얻어갔다고 해.
아까부터 급하게 필요했는 데 내가 있어서 말을 못 했나 봐.
그래 여자들 사이에서는 별거 아닌 일이 수 있겠지만
그게 남자 담임 선생님이라면 또 이야기가 다른 가봐.
형제뿐인 우리 집에서 생리대가 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저 생물시간에 잠깐 배웠을 뿐이니까.
고학년이니까 혹시나 해서 학기초부터 나는 괜찮으니까 그런 어려움 있으면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나만 괜찮았던 거야.
그래도 내가 어려우면 옆반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했지만
눈치 없게 그 사이를 내가 가로막고 있었네. 아 내가 바보 같고 멍청하게 느껴졌어.
눈치가 없었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도 기분이 이상했어.
다시 만난 아이가 잘 지내보여서 별 말 못 하고 그냥 모른 척했어.
사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판단이 잘 안 섰어.
월경이 나쁜 것도 창피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말이지.
이런 거 보면 나도 참 옛날 사람인 건가.
하긴 살면서 내 입에서 월경, 생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겠어.
그나마 제일 가까운 여자인 아내가 가끔씩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남자들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고통임을 머리로만 느낄 뿐이지.
생리대가 생각보다 비싼지도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너무 아이들을 애기로 생각했었나 봐.
아이가 잠시나마 눈치 없는 나 때문에 당황했을 것을 생각하니 또 없는 머리털 쥐어짜게 된다.
아무튼 그 날은 월경이 서툰 그 여자아이도 여자가 서툰 남자 선생님도 참 어려운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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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땐 엄마가 생각이 난다.
오늘만큼은 우리 반 아이들처럼
엄마한테 실컷 고자질하고 싶다.
어두운 밤 침대에 누워 졸려 무거운 눈꺼풀을 참고
하얀 창에 검정 글씨로 아무에게도 말 못 한 오늘을
두 엄지로 두드려 내려가 본다.
선생님이 되어도 난 엄마 아들이고
결혼하고 아빠가 되어도 난 엄마 아들이다.
나도 엄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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