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네선생님은최악이다]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서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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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14:37
작년 늦봄 잊고 있던 제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A입니다. 혹시 B소식 들으셨어요??”
커피숍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저는
수시입학이나 연예계진출? 쯤인 줄 알고 기쁜 마음에 들떠
잠시 나가 A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봄이 왔습니다.
지난 주말은 제자가 쉬고 있는 곳에 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선생님 저 00대학교 갔어요!”라고 이야기할 것 만 같습니다.
아니 연락이 잘 닿지 않더라도 페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린 중2병 가득한 인증샷을 보며
잘 지내고 있구나 안심하고 훈훈해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보다 축구가 그렇게 좋다던 아이는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잔디밭에서 쉬고 있습니다.
내 품을 떠난 아이들의 졸업식이 끝나고
대학교입학식 시즌이 되자 문득 그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아이가 제 곁에 있어줬더라면 지금쯤 성인이라며 소주한잔 겉멋부리고 있었을 텐데…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하여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가까워질 수록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언덕이라 바람은 쌀쌀했고
잔디는 아직 푸르름을 되찾지 못 했습니다.
꼭 한번 더 가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발걸음이 너무 무거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아이 옆에 앉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제가 평소에 특별히 잘 해준것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가장 힘든 아이의 옆을 지켜준 학생,
공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했던 학생,
든든해서 심부름을 엄청 시켰던 학생,
그럼에도 항상 나를 좋아해준 학생,
지금도 점심시간 축구공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손을 뻗어 비석을 쓰담듬었습니다.
1-50-255, 마치 학번 같이 느껴집니다.
차가워진 묘비에 제 손이 시려옵니다.
아픈 가슴을 누르며 돌이 온기를 되찾을 때까지 매만졌습니다.
그렇게 봄을 알리는 바람을 함께 맞으며 옆 자리를 지켰습니다.
문득 주변은 돌아보니 짝궁들은 다 할아버지, 할머니였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떠나는 길에 그들을 향해 크게 두번 절을 하며 인사를 올렸습니다.
“우리 00이 잘 좀 부탁합니다. 착한 아이니 외롭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니도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많이 도와드리라. 알았제?”
다른 성묘객에게 눈물을 들키기 싫어
공원은 빙둘러가며 멀어지는 자리에
아쉬운 눈길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놈아
세상이 너를 잊더라도 선생님은 너를 기억할게
니가 어려울 때 내가 손을 못 내밀어준거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게
그렇게 다른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어주며 속죄하며 살아갈게
너무 미안하고 사랑한다. 이 나쁜 놈아.
내일 모레면 아이의 생일입니다.
지금도 글을 적어내리며 후회와 미안함에 눈을 적십니다.
아마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평생
나보다 먼저 떠난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하며 살아가겠죠.
제가 좋은 선생님으로써의 마음이 흔들릴 때면
내가 굳이 좋은 선생님일 필요가 있나? 나태해 질때면
아이들이 날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해줄까? 의심이 들때면
그 아이가 혼자서 힘들어했었을 오랜 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시 잡아봅니다.
아이의 잘못된 선택이 저뿐만 아니라
아이의 다른 선생님들의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선생님 힘들어요.
라고 제게 메세지라도 보내줬었더라면…
그럴 수 있을 만한 선생님으로 기억됬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숨기고 싶은 아픈 사연이지만
혹시나 지금 선생님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흔들리고 계신분이 있다면
지금 저 아이때문에 내가 정말 미칠 것 같고
월급값에 비해 어렵고 힘든일이라 지치고
세상의 편견에 교사로써의 사명마저 잃어갈 것 같은 그 시절 저 같은 선생님 단 한 분이라도
있을까봐 아이에게 기도로 허락받고 나눕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저노무 말썽꾸러기 아이에 손을 잡아줄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A입니다. 혹시 B소식 들으셨어요??”
커피숍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저는
수시입학이나 연예계진출? 쯤인 줄 알고 기쁜 마음에 들떠
잠시 나가 A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봄이 왔습니다.
지난 주말은 제자가 쉬고 있는 곳에 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선생님 저 00대학교 갔어요!”라고 이야기할 것 만 같습니다.
아니 연락이 잘 닿지 않더라도 페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린 중2병 가득한 인증샷을 보며
잘 지내고 있구나 안심하고 훈훈해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보다 축구가 그렇게 좋다던 아이는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잔디밭에서 쉬고 있습니다.
내 품을 떠난 아이들의 졸업식이 끝나고
대학교입학식 시즌이 되자 문득 그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아이가 제 곁에 있어줬더라면 지금쯤 성인이라며 소주한잔 겉멋부리고 있었을 텐데…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하여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가까워질 수록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언덕이라 바람은 쌀쌀했고
잔디는 아직 푸르름을 되찾지 못 했습니다.
꼭 한번 더 가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발걸음이 너무 무거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아이 옆에 앉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제가 평소에 특별히 잘 해준것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가장 힘든 아이의 옆을 지켜준 학생,
공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했던 학생,
든든해서 심부름을 엄청 시켰던 학생,
그럼에도 항상 나를 좋아해준 학생,
지금도 점심시간 축구공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손을 뻗어 비석을 쓰담듬었습니다.
1-50-255, 마치 학번 같이 느껴집니다.
차가워진 묘비에 제 손이 시려옵니다.
아픈 가슴을 누르며 돌이 온기를 되찾을 때까지 매만졌습니다.
그렇게 봄을 알리는 바람을 함께 맞으며 옆 자리를 지켰습니다.
문득 주변은 돌아보니 짝궁들은 다 할아버지, 할머니였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떠나는 길에 그들을 향해 크게 두번 절을 하며 인사를 올렸습니다.
“우리 00이 잘 좀 부탁합니다. 착한 아이니 외롭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니도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많이 도와드리라. 알았제?”
다른 성묘객에게 눈물을 들키기 싫어
공원은 빙둘러가며 멀어지는 자리에
아쉬운 눈길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놈아
세상이 너를 잊더라도 선생님은 너를 기억할게
니가 어려울 때 내가 손을 못 내밀어준거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게
그렇게 다른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어주며 속죄하며 살아갈게
너무 미안하고 사랑한다. 이 나쁜 놈아.
내일 모레면 아이의 생일입니다.
지금도 글을 적어내리며 후회와 미안함에 눈을 적십니다.
아마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평생
나보다 먼저 떠난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하며 살아가겠죠.
제가 좋은 선생님으로써의 마음이 흔들릴 때면
내가 굳이 좋은 선생님일 필요가 있나? 나태해 질때면
아이들이 날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해줄까? 의심이 들때면
그 아이가 혼자서 힘들어했었을 오랜 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시 잡아봅니다.
아이의 잘못된 선택이 저뿐만 아니라
아이의 다른 선생님들의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선생님 힘들어요.
라고 제게 메세지라도 보내줬었더라면…
그럴 수 있을 만한 선생님으로 기억됬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숨기고 싶은 아픈 사연이지만
혹시나 지금 선생님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흔들리고 계신분이 있다면
지금 저 아이때문에 내가 정말 미칠 것 같고
월급값에 비해 어렵고 힘든일이라 지치고
세상의 편견에 교사로써의 사명마저 잃어갈 것 같은 그 시절 저 같은 선생님 단 한 분이라도
있을까봐 아이에게 기도로 허락받고 나눕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저노무 말썽꾸러기 아이에 손을 잡아줄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