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쌤의 슬로리딩클럽] 01. 12색 크레파스와 거짓말 하는 어른 (프롤로그)
이번주부터 슬로리딩클럽 연재를 시작합니다. 거창하게 예고를 했지만, 꾸준히 쓰는 것에 중점을 두고 쓰려합니다. 아동문학, 느리게 읽기에 대한 제 생각과 수업경험 및 노하우들을 안내해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01. 12색 크레파스와 거짓말 하는 어른 (프롤로그)
1. 12색 크레파스로 인생을 말하다.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표시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으으 으으"
턱이 파르르 떨리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났다. 오줌 줄기처럼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아버지 얼굴, 손을 꼭 쥐었을 때의 느낌, 입 냄새, 숨소리, 코고는 소리, 양치질 소리, 이마 촉감… 아주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할아버지 마지막 부탁이 떠올랐다.
"빤스 깨끗하게 빨아 줘."
『유은실, 마지막 이벤트 79p 中』
어젯밤까지 곁에서 함께 자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아침, '마지막 이벤트'의 주인공 영욱이는 울면서 할아버지의 속옷을 빨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속옷은 어머니, 부인, 도우미 아줌마 3명만 빨 수 있다는 할아버지, 나이가 들어도 며느리에게 속옷만은 빨게 하고 싶지 않아 상자에 숨겨두고 빨던 할아버지가 죽기 전날 밤에 영욱이에게 했던 마지막 부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장례식장, 화환, 손님 등을 생각하는 동안 주인공 영욱이는 할아버지의 부탁과 약속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아이들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나도 어릴 때가 있었으니까 너네를 다 이해할 수 있어.'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10살때 혹은 11살때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았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그러한 눈높이로 아이들과 대하고 계신가요?
"저는 아이들과 소통이 잘되요. 아이들도 나를 좋아하구요. 정말 잘 어울리고 있어요!"
친구같은 선생님,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싶지만 결코 친구는 될 수 없습니다. 쓰고 있는 언어도 다릅니다. 생각하는 모습도 다릅니다. 어른들이 48색의 크레파스로 세상을 그리며 살고 있다면, 아이들은 12색의 크레파스로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쉬운 말로 이야기하고 아이들 입장에서 공감하고 이야기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12색의 크레파스로 그려진 작품들을 함께 읽으며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교감할 소재가 생겼습니다. 저와 1년 동안 슬로리딩 수업을 했던 한 아이는 마지막에 슬로리딩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불량한 자전거 여행을 처음 보던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책으로 무엇을 할까? 정답은 슬로우 리딩(slow reading)이었다. 그것의 뜻은 느리게 읽기이다.
선생님과 학생이 교감을 나누고 서로 맞춰가며 책을 읽는 것이다"
2. 거짓말 하는 어른이 되어 주다!
"책 읽어라!"
"왜요?"
"책을 많이 읽으면 공부도 잘할 수 있고, 훌륭한 사람도 될 수 있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은 책을 왜 읽으시나요?
교훈을 얻기 위해서?
줄거리를 알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면 인터넷 포털사이트만 검색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요약본만 줄줄이 외우면 되겠죠. 논술공부를 위해 다이제스트를 단시간에 읽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풍경이 기적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책을 읽습니다. 주인공의 고민과 내 고민이 같으면 더 열심히 읽게 됩니다.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 하게 되고 작품속 주인공과 결국은 친구가 됩니다.
그럼 아이들에게는 왜 아동문학이 필요할까요?
혹시 독서마저 독해라는 역량으로 인식해서 안내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이들도 공감받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간섭하지 않는 시간,
자신과 비슷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안에서 서럽게 울고 뒹굴며 작품 속 상상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바깥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생각보다 빨리 내가 괜찮아질 것 같은 일이 생겼다. 전학 온지 얼마 안되는 김명인. 명인이가 혜수 눈에 걸려든 것이다.<중략> 선생님들은 대개 예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을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시험 성적 좋은 애를 칭찬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질투가 심한 애한테는 아주 듣기 싫은 소리일 것이다.
<중략>
혜수가 띠껍다는 듯 명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느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나쁜 공기가 옮겨 가는 걸.
『어느 날 구두에게 생긴 일 22-24p中』
그래서 저는 지나치게 교훈적인 동화를 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건강한 이야기, 아이들이 건강하게 실패하는 이야기를 언제나 찾아서 소개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성공하는 경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괜찮아 실수할 수 있어. 실패할 수 있어. 다른 많은 친구들이 실패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야. 나도 괴로웠어." 라고
어른이 만들었지만 어른이 만들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편안한 공간, 감쪽 같은 거짓말을 하는 동화들을 더 소개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기쁨을 구체적인 방법과 함께 나누어드리고 싶습니다.
함께 해 주시고 의견도 많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저의 슬로리딩수업의 두 축, 작품연구활동과 샛길새기 활동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