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읽어요] 서핑, 그것은 운명.
스물 네 살 내 월급을 모아 떠났던 첫 해외여행은 호주로 가는 여름 휴가였다. 모든 여정을 홀로 다녀올 순 없어서 여행 중 투어를 신청했는데 외국인들 사이에서 단 한 명의 한국인 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투어를 하는 1박 2일 동안 꽤 친해졌고 마침 다음 행선지가 겹치는 것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다음 도시로 함께 이동했다. 그녀는 골드코스트에 가면 꼭 서핑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 계획 없이 여행 중이었던 나는 언니가 제안한 '서핑'계획에 흔쾌히 동참했다.
365일 햇볕이 반짝거리는 해안가로 유명한 골드코스트의 모습을 기대하였으나 도시에 도착하니 날이 흐리고 구름이 꾸물거려서 우중충하였다. 심지어 오후가 되자 먹구름이 끼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는 숙소에서 연결해주는 서핑 강습을 받기로 했다. 내가 묵은 숙소와 언니가 묵은 숙소는 달랐는데 내가 묵은 숙소의 리셉션에서는 "누가 이런 날에 서핑하니? 밖을 봐~" 하면서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했는데 언니가 묵은 리셉션에서는 "이런 날에도 서핑은 하지!"하면서 서핑 강습을 연결해주었다.
다음날, 비는 더욱 거세져서 바다에 나가는 건 미친 행동으로 보였고 '과연 이런 날에 정말 서핑을 할까?' 의심이 되었다. 내심 강습비만 받고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예정된 시각에 맞춰 아주 푸근한 인상의 아줌마가 우리를 서핑 강습 포인트에 데려다주기 위해 진짜로 나타났다. 그녀의 픽업 차에 타며 '나 진짜 빗속에 서핑하러 가는구나.'를 깨달았다. 드라이버 아줌마는 흐린 날을 매우 아쉬워하며 '골드 코스트는 일 년 내내 햇빛이 쨍쨍한 도시인데 너희가 하필 비 오는 2~3일에 왔어. 그래도 서핑은 재밌을 거야!'라며 우리의 선택이 헛되지 않은 것일 거라고 달래주었다.
비는 해안가에 도착하여도 멈추지 않았고 부슬비를 맞으며 서핑수트로 갈아입고 해안가로 모였다. 거기엔 우리 말고도 서핑 레슨을 신청한 사람들이 더 있었다. 이런 날씨에 함께 서핑을 배우다니 묘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비를 맞으며 바닷가에서 강사를 따라 포즈 연습을 하였다. 엎드려 있다가 재빠르게 일어나 중심 잡는 연습을 땅에서 세 번 정도 따라 했을까? 강사가 'Let's go!' 하면서 바다로 향하였다. '어어. 이론 5분 만에 들어가는 건가?' 했지만 어리바리한 사이 내 몸은 이미 물에 들어가 있었다. 호주 서핑은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실전이었다. 그렇게 폭우 속의 서핑이 시작되었다.
물 위에서는 얼굴을 때리는 비를 맞으며 빗속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파도를 봐야 했다. 어떤 파도를 타는 게 좋은지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파도를 타기 위한 기회를 엿보다 겨우 파도를 잡으면 일어서보지도 못하고 고꾸라졌다. 평소 수영을 좋아해서 같은 물에서 하는 레저라 서핑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균형을 잡는 것은 완전히 다른 스포츠였다. 그 뒤로 빗속에서 무한 반복 서핑 시도를 했다. '파도가 온다, 잡아본다, 일어나 본다, 넘어진다, 다시 파도가 치는 포인트로 헤엄쳐 간다'는 반복이었다. 곁눈질로 다른 사람 중 일어나서 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얼마나 부럽던지.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무릎에 멍이 드는 것처럼 물을 먹고 파도에 휩쓸렸다. 또다시 파도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는 순간 균형을 잃으며 넘어졌는데,
'퍽!'
물속에서 파도에 밀린 보드가 내 얼굴을 힘껏 가격하였다. 보드에 맞은 오른쪽 뺨에 감각이 없고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코피가 나는 건 아닐까. 코밑으로 흐르는 바닷물이 코피는 아니겠지.' 나의 첫 서핑에서 피를 보는 건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코뼈는 무사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뺨을 맞아봤다. 피가 안 나는 걸 보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서핑은 그런 매력이 있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휩쓸려도 다시 파도로 들어가게 되는 매력. 그렇게 일어서고 넘어지고 온몸에 힘이 빠지며 레슨이 끝날 때쯤 드디어 파도를 타는 데 성공했다. 빗속에서 뺨 맞고 고생하다 인생 처음 파도를 탄 그 짜릿함이란! 비를 맞으며 타는 희열감이란!
이게 나와 서핑의 강렬한 첫 만남이다.
내가 처음 서핑을 알게 된 때에는 국내에 서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계절에 상관없이 이름이 좀 알려진 국내 해변에서는 서핑 강습을 받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바리안 데이즈(Barbarian Days: A Surfing Life)>는 나처럼 서핑의 매력을 맛본 사람에게, 그리고 여름 휴가에 느낀 서핑의 여운을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윌리엄 피네건의 자서전적 에세이로 파도와 함께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낸 책이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그는 10대 무렵부터 파도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온 청춘을 서핑에 헌신하고 그 과정에서 서핑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그는 서핑하기 좋은 파도를 찾아 전 세계의 바다를 모험한다. 그가 좋은 파도를 찾아 떠난 모험의 시대는 구글맵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여서 지도와 서퍼의 직감, 서퍼들 사이의 소문만으로 타기 좋은 파도를 찾아 나서야 했다. 우리는 새로운 곳을 탐험한다고 할 때 미지의 영역을 처음 발견한다는 설렘, 기대감, 멋짐을 상상하지만 넉넉지 않은 모험의 시간은 고난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는 '좋은 파도를 타고 싶다, 타고 말 테다'라는 열망을 간직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파도 포인트를 직접 두발로 찾아 나선다. 태평양의 외딴 무인도에 최소한의 식량과 물만 가지고 현지인의 배를 얻어 타고 가서 일주일을 생존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자신이 기다리는 파도가 오는지를 확인하지 않나, 변변한 직업 없이 서핑만을 위해 고물차를 타고 호주 횡단 여행을 하지 않나, 도저히 정복하지 못할 것 같은 큰 파도에 죽을 뻔했지만, 다시 도전하지 않나.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현재의 파도와 서핑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바다는 그에게 놀이터이자 자신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자 언제 죽음의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는 시험장이었다. 파도와 사랑에 빠진 순정 마초, 윌리엄 피네건은 한평생 그의 인생에서 불타오르던 순간을 따라가다 보면 그를 따라 파도를 타러 가고 싶다가도, 과연 내가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까 떠올리게 된다. 내 인생을 더 열정적으로 살게 한다.
한편, '나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데. 서핑, 그게 뭔 재미겠어?'라는 사람은 <하와이하다>를 읽으면 바다에 둘러싸인 곳에 사는 사람은 서핑을 할 수밖에 없을 줄 알게 된다.
해외여행 마니아인 선현경과 이우일은 하와이에서 일 년 살기를 하면서 어디를 가든 빛나는 태양이 반짝이는 파도와 서퍼들을 마주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와이에 간 게 아닌 그들은 할 일도 없던 차에 예전에 사둔 보디서핑 장비를 떠올리고, 중년의 나이에 첫 서핑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일 같이 바다에 들러 서핑을 하며 일 년 동안 원 없이 서핑을 하고 돌아온다. 바다에 나가면 언제나 그들에게 서핑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몇 번 타다 보니 서로의 얼굴을 익히게 되고 어느새 바다에서 눈짓으로 인사하는 서핑동료가 되며 함께 파도를 탄다. 인생 처음으로 서핑을 배우며 그들은 전에 없던 즐거움을 느낀다. <하와이하다>는 서핑뿐만 아니라 이우일의 알로하 셔츠에 대한 덕질, 선현경의 훌라 춤 수업 등 하와에서만 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며 하와이에서 어떻게 만족스러운 일 년을 보낼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한 이우일이 곳곳에 그린 낙서같은 하와이 풍경과 일러스트는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이 두 책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짭짤한 바다 맛이 느껴질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들처럼 바다에 몸을 맡기고 싶다. 바다에 미쳐보고 싶다. 파도가 나를 삼켜본다는 건 무엇일까. 친근하기만 하던 존재가 어느 순간 나를 앗아갈 것 같은 섬뜩함을 느낀다는 건 무엇일까. 그들이 하와이로, 태평양으로 떠날 수 있던 것은 자신들을 발목 잡는 직업이 없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교사로 뿌리내린 나는 뿌리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지기 전에 떠나볼 수 있을까?
다음 여름휴가도 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