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으로 살기 힘들다_ (6)이직 준비
선생님으로 살기 힘들다
- 이직 준비
올해로 교사 8년 차, 동료 선생님들은 아직도 ‘애기선생님’으로 봐주시지만 사실 사기업으로 치면 과장도 될 수 있는 핵심 연차다.
설렘을 안고 들어선 교실에서 첫사랑과도 같은 아이들을 만났고,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주고받은 강렬한 경험이 아직도 선명하다. 해가 갈수록 반복되는 교실 생활에서 나는 좀 더 능숙한 선생님이 되었고, 수업 기술이 늘었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이 쉬워졌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에 우쭐해 있을 때 나에게 좌절감을 주는 아이를 만났다.
어떻게 지도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고 화내는 나를 아이는 비웃었다. 아이 앞에서 감정의 기복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날이 많아지던 날부터, 나는 악몽을 꾸었다. 꿈에 그 아이가 나왔고 나는 처절하게 분노했다. 꿈을 꾸고 나면 식은땀이 흥건했다. 버티는 심정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무사히만 넘기자.’ 반 아이들은 내가 거리를 두자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첫해의 나는 분명 교사로서 엉망이었다.아이들과 적당한 선을 유지하지 못했고, 교육과정을 제대로 가르쳤는지도 의문이며, 학급경영이 뭔지, 그냥 주먹구구식의 한해살이였다. 그러나 그해에 내가 아이들과 만들었던 유대감은 특별했다. 나도 아이들도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신기하다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숙련된 최근의 나는 교사로서 강점이 많았다. 학급경영 스타일도 해마다 다듬어져 나와 아이들에게 맞는 지점을 찾을 줄 알았으며, 교육과정 재구성을 어느 정도 그릴 수 있고, 차시에 맞는 수업 형태를 즉흥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과 만드는 유대감은 해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느낌이다.특히 버티면서 출근했던 그해 이후, 나는 ‘나 정년퇴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올해 코로나로 인해 교실에서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처음에는 ‘잘 됐다!’ 고 생각했다.많이 지쳐있었고 아이들과 맺어야 하는 관계가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지던 시기였다. 수업에만 집중하면 되겠네. 생활지도 빠져서 편하겠어. 나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각종 취미와 자기계발을 탐닉했고, 학교는 먼 뒷순위로 밀려났다.
그런데 1학기 중간쯤, 현타가 씨게 왔다.학교에서 하는 일들이 내게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을 화상으로 만나는 그 짧은 시간도 귀찮았다. 기계적으로 과제를 내고 코멘트를 다는 날 보면서, 나는 무기력감에 휩싸였다. 무기력감은 자연스럽게 우울로 변했다.나는 퇴근 후에 옷도 벗지 않고 거실 바닥에 누워버렸다.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이유 없이 서글퍼져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짝꿍은 이런 나를 걱정하며 물어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그런데 왜 그래.”
“모르겠어. 그냥 우울해.”
나의 맥빠지는 대답에도 짝꿍은 끈질기게 물어왔다.
“하루 있었던 일 중에 그래도 제일 별로였던 게 있을 거 아냐.”
“음... 학교 가는 게 싫어.”
짝꿍은 나의 대답에 놀란 눈치였다.
“요즘 재택도 많고 애들도 많이 안 봐서 좋다고 했잖아?”
“응. 근데도 싫어. 지쳤나봐.”
짝꿍은 곰곰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지예야, 이직은 어때?”
“이직?”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러다 말 건데, 무슨 이직이냐고. 권태기처럼 지나가는 그런 거라고. 왜 일하다가 회사 가기 싫을 때도 있지 않냐고. 투정부리는 건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떡하냐고.
나는 짜증으로 대꾸했고, 짝꿍은 대답했다(아마 엄청 참았을 것이다.)
“나는 진심인데. 너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도 있다고 했었고, 지금 네 나이가 취업시장에서는 마지노선이나 다름없어. 인생을 길게 봤을 때 교사라는 한 커리어로만 경험을 쌓는 것보다, 다른 스펙트럼의 일도 해 보는 게 결과적으로 네 성장에 훨씬 좋지 않을까.나는 적극 추천하는데.”
그 대화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나자, 정말로 이직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무엇보다도 이제 취업에 마지노선이라던 내 나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채용공고 어디서 확인해?”
나는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일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왔다. 열심히 채용조건을 확인했고, 관심있는 회사의 홈페이지를 탐독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교사’라는 스펙은 취업시장에서 ‘무경력’과 같다는 걸,
‘교대’라는 스펙은 취업시장에서 ‘고졸’과 다름없다는 걸.
매력적인 일들은 대부분 경력 우대, 전공자 우대였다. 그리고 내 눈에 매력적인 일은 남 눈에도 매력적이어서 경쟁률이 상당했고, 이미 탄탄한 경력을 갖춘 능력자들이 넘쳐났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이직할 수 있을까. 대부분 문제집을 만드는 출판사나 교육 관련 회사들이었다. 다른 스펙트럼의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었던 나는, 취업시장의 현실 앞에 좌절했다.
1학기 말이 되자, 아이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무기력감과 우울에 휩싸였던 나는 신기하게도 다시 학교의 리듬에 맞춰 큰 감정의 동요없이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그토록 보고싶지 않던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시작하자, 우울감을 잊고 일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이건 정말 운이 좋다. 아이들이 예뻐 보이고 아니고는 내 의지에 달린 것 같지 않다.).
나는 교사가 천직인가?
아이들을 만나고 회복된 걸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냥 우울감을 잊은 것뿐인가?
패턴화된 루틴에 몸이 바쁘다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다시 아이들 이야기를 집에서 재잘대는 날 보면서, 짝꿍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때 너한테 그렇게 말하고 나서, 회사 팀 사람들에게 네 얘기를 한 적이 있거든. 와이프가 교사를 그만두고 싶어한다고. 근데 모두들 결사반대하는 거야. 너가 잘 몰라서 바람 넣은 거라고. 교사만한 게 없다고. 직장생활 뻔한 거 알지 않냐고. 선배님들이 막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아차 싶더라고. 사실 나 회사 다니는 거 봐서 알겠지만, 삭막하고 여유 없잖아.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잡코리아 뚫어져라 보는 너를 보면 겁나기도 했는데, 이렇게 다시 애들 얘기하는 거 보니 다행이고 반갑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짝꿍의 느닷없는 고백을 듣고 폭소했다.
“나한테는 인생의 경험 얘기하면서 충동질해놓고.”
“어.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은 없어. 근데 굳이 안 가봐도 되는 험한 길은 일부러 안 가도 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스스로 성찰하고 애들 생각하는 너는 충분히 좋은 선생님이야.”
이렇게 나의 이직 준비는 짝꿍의 위안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감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거기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 몇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는다.
- 비슷하게 반복되는 해마다의 루틴에서 매너리즘을 느끼기 쉽다. 교직에서 자기계발을 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이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연구회, 또는 대학원에서 관심사가 맞는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거나, 책을 집필하여 발표하거나 하는 등의 자기계발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직원 상담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한다.
- 모리샘에게 추천받았는데, 필요한 시기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교직원공제회에서 회원에게 매해 5회기씩 지급하는 상담프로그램을 신청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상담사와 나누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해소될 수 있다.
+ 그동안 ‘선생님으로 살기 힘들다’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꾸벅!) 8년 교사 인생 최대 위기였던 올해,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많이 정돈할 수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선생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는데,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저는 교직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야말로 좋은 선생님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좀 더 단단한 선생님이 되실 거예요. 고민한 사람과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같지 않으니까요. 선생님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