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속, '82년생 김지영'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창비)에서 지은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명명한다. 차별에 반대하며 평등과 공정을 지향하는 우리 중에는 분명 차별주의자가 없다. 사회 구성원 중 아무도 차별주의자가 없다면 그 사회가 매우 정의롭고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차별을 받는’ 사람들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차별을 한 사람은 없고, 차별을 받은 사람만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언어로 이 책에는 ‘결정장애’가 소개된다.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성향을 가리켜 우리는 쉽게 자신을 ‘결정장애’라고 칭한다. 이 말은 단어가 전달하는 의미가 상당히 직관적이어서 자주 쓰인다. 그런데 그 뜻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정을 잘 하지 못하는 나를 비하하는 ‘자기비하’의 유머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차별적으로 지칭하는 말로써 해석될 수 있다. 누군가를 차별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선량한 마음으로 유머를 던지기 위해 이 단어를 썼다면 당신도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갑자기 이런 화두를 왜 던지느냐 하면(그것도 이렇게 예민한 시국에) 바로 이 상황의 축소판이 교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때는 상담시간이었고, 상담선생님께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수업 주제로 다루시면서 남성범죄자들을 예로 드셨다. 여학생들이 조심해야 한다는 걱정과 당부의 말씀이 끝나자, 남자아이들 몇몇이 수군댔다. “이거 성차별 아냐?” “성차별이야.”
수업이 끝나고 여자아이들이 내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나는 남자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물어보았다. “남자만 범죄자인 것처럼 들려서요.” “사실 남자들도 조심해야 하는데 여자애들한테만 조심하라고 하니까 성차별처럼 느껴졌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사건의 비율이 여성대상 범죄가 높다보니 그렇게 느낀 것이다, 당연히 남자도 조심해야 한다. 등등 타일러서 자리에 앉혔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최근 교실 속 남녀 관계에서 잡음이 많았던 터였다.
수학 수업을 잠시 미루고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먼저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해줬다.너희도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누군가를 자기도 모르게 차별한 경험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남자와 여자를 차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성별로 남녀를 차별하는 경우는 많다. 오늘은 그 차별의 범위를 성별로 좁혀서 논의해보자고 했다.
먼저 포스트잇에 자신이 남자로서/여자로서 차별받은 경험을 쓰게 했다. 되도록 학교 내에서, 올해에 있었던 일로 적게 했다. 학교 안에서 차별받은 때의 감정을 서로 공감하고 이해해서, 결과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쓴 차별을 유목화하니 다음과 같았다.
<남자>
1. 체육시간에 여자에게 유리한 규칙
2. 남자가 당연히 여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
3. 여자는 남자를 때려도 되는데 남자는 왜 안 돼?
4. 남자에 대한 고정관념 (울면 안 돼, 무거운 건 남자가 등)
<여자>
1. 체육시간에 남자들만 공을 주고받는 것
2.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 (여자가 힘이 왜 이렇게 세, 여자는 예쁘고 날씬해야지 등)
전반적으로 체육시간에 차별받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많았고,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차별의 스펙트럼이 넓었다.모수가 작아 일반화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만, 우리 반의 경우에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차별을 당한다고 느끼는 분야가 다양했다.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은 발달단계 특성상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몸집이 크고 사고가 빠른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내가 맡아왔던 학급에서는 대개 여자아이들이 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대부분의 초등교사는 여성이다. 나 또한 여성이다. 물론 최대한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남자아이들의 마음을 모두 읽어주지 못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남녀 교대로 하나씩 읽어주고,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공감의 말을 건네게 했다.이 때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감정카드’다. 물론 감정카드가 없어도 진행할 수 있지만 카드의 활용은 감정의 구체적인 선택을 돕는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교사: ‘여자는 남자를 때려도 되는데 남자는 때리면 안된다.’이때 남자아이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감정카드를 이용해 공감해주자. 이때 이유를 꼭 말해줬으면 좋겠어.
여학생1: 여자애들은 되는데 남자애들은 안된다고 하니까 (감정카드를 들며) 답답했을 거 같아요.
여학생2: 여자애들이 때릴 때 (감정카드를 들며) 억울하고 화났을 것 같아요.
남학생: 공감해줘서 고마워.
나는 의무적으로 한 번씩은 공감하는 경험을 갖도록 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이들의 태도가 진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름의 의미있는 피드백을 받았다. 엄마에게 집에서 차별수업에 대해 얘기하고 공감받았다는 아이가 있기도 했고, 주 2회 쓰는 생각공책에 이 주제로 글을 쓴 아이도 있었다.
그럼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혐오 대 혐오로 양분되어 반응하는 댓글창에서, 상대가 처한 처지에 공감하기만 해도 혐오는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공감의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이런 세상이 곧 오기를.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몰랐어요. 승진에서 차별받고 육아로 스트레스 받는 게 더 이상 여성의 몫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성 역시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에서 힘든 걸 내색하지 못할 때 너무 답답할 것 같아요. 아름다운 나이에 군대에서 청춘을 보내야 하는 이 상황이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