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나무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짬그교18] 마르크 시몽 그림, 재니스 메이 우드리 글 <나무는 좋다>
영화 <옥자>에 등장한 이끼계곡, 실제로 있다. ⓒ (주)NEW
"선생님! 작년에 수연이네 집 근처에서 옥자 찍었어요."
수연이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찰랑거렸다. '옥자' 촬영팀이 도계읍 무건리 이끼계곡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수연이가 사는 고사리 바로 옆이었다. 예고편으로 계곡 장면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우리 동네 나왔다고 손뼉을 쫙쫙 쳤다.
"저기 가려면 한 시간 걸어야 돼요. 완전 힘들어."
아빠랑 예전에 다녀와본 성욱이가 무릎을 탁탁 털었다. 산간벽지 마을에서도 한참 걷고 밧줄까지 타야 겨우 나타나는 이끼 군락은 울창한 숲에 둘러 쌓여 있다. 원시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이끼계곡은 나무들이 꼭꼭 숨겨둔 덕택에 여태 살아남았다.
그런데 세계적인 감독이 만든 영화에 등장해버렸으니 계곡은 조용히 지내기 어렵게 되었다. 실제로 '옥자' 개봉 이후 탐방객들이 급증했다. 도계읍 주민인 아이들에게 무건리 숲처럼 에메랄드빛 이끼계곡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숲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무는 좋다>를 함께 읽었다.
1957년 칼데콧 상 수상작이다 ⓒ시공주니어
"나무는 매우 좋다. 나무는 하늘을 한가득 채운다. "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푸른 숲에 아이가 벌렁 누워있다. 빽빽하게 뻗은 가지와 나뭇잎이 파란 대기를 메운다. 두 페이지에 걸친 그림 한 장과 문장 두 개, 그걸로 끝이다. 다음 장을 넘겨 본다.
"나무는 강가에도 벋고 계곡 아래에도 벋는다. 나무는 언덕 위에서도 자란다."
진한 녹색으로 가득 찼던 화면이 부드러운 흑백으로 바뀌었다. 소년이 강가에 떠내려온 나무줄기에 서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앞 페이지와 마찬가지로 넓은 그림 한 장에 달랑 두 문장이다. 단순한 구조다.
"나무는 숲을 이룬다. 나무는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
뜨거운 태양이 우뚝 솟은 나무들 위로 맑은 햇살을 내리깐다. 이쯤 되면 책이 한 편의 시처럼 짧은 시구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책장을 뒤집으면 다시 간결한 회색 풍경이 그려진다.
"나무가 딱 한 그루밖에 없다 해도, 그래도 좋다. 나무는 잎이 있어서 좋다. 나뭇잎들은 여름 내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인다."
사람에게만 나무의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드넓은 목장에서 뛰어놀던 말은 산들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에서 쉰다. 아이들은 지난 체육 시간에 앉아 있었던 버드나무 그늘을 떠올렸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지나가는 쉼터는 뙤약볕을 피하기에 최고다.
"쟤들도 나무 밑에서 쉬네요. 우리도 그랬는데."
나무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나무가 좋은 이유가 거창하지 않게 소개된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 쓴 소박한 문장을 읽다 보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나무가 왜 좋은지 굳이 이유를 꼽아본 적도 없다. 계속 다음 장이 궁금해진다.
따뜻한 색채의 그림이 정겹다. ⓒ시공주니어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우리는 낙엽 속에서 논다. 우리는 낙엽을 밟기도 하고 그 위에서 뒹굴기도 한다. 우리는 낙엽으로 집을 짓는다. 그리고 갈퀴로 낙엽을 긁어 모아 모닥불도 피운다."
아파트가 일반화된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숲을 끼고 지은 집 마당에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곱게 쌓였다. 아이들이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리는 듯하다. 현대인들이 놓치기 쉬운 즐거움이다.
새로운 놀이 방법의 등장에 우리 반 까불이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책을 넘기자 나무 타기, 나무로 해적선 놀이하기, 밧줄 타고 내려오기가 차례로 소개된다. 나무가 좋은 까닭 중 상당수가 놀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네를 매달고, 꽃바구니를 걸고, 떨어진 잔가지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고... 나무로 하는 놀거리가 이렇게나 많다.
"캠핑 가면 다 할 수 있는데... 선생님, 학교가 산에 있으면 좋겠어요."
산에 있는 학교라, 정말 근사한 생각이다. 그럼 쉬는 시간마다 나무를 타고 놀 수 있을 거다. 솔방울 싸움도 하고, 큰 나무 위에 아지트도 짓고. 아이들이 꿈꾸는 학교는 놀이터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학교는 아이들의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답답한 마음은 캠핑장에 가서야 풀어진다. 그나마 자식들 데리고 캠핑 갈만한 형편 되는 집에서나 가능한 해결책이다.
"좀 있다가 얼음땡 한 판 할까?"
놀자는 말에 금방 화색이 돈다. 답답한 마음을 푸는 최고의 약은 쉼과 놀이다. 나무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해준다. 숲에 들어가면 평온한 감정이 들고, 차분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쉴 휴(休),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은 편안하다. ⓒ시공주니어
책을 덮고 나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나온 나무가 좋은 이유 중 가장 끌리는 하나만 고르라 했더니 거의 다 낚시하기, 그네타기, 매달리기처럼 노는 걸 택했다. 반면 내가 뽑은 문장은 달랐다.
"사람들도 나무 그늘에서 소풍을 즐긴다. 아기도 나무 그늘 유모차 안에서 낮잠을 잔다."
아기가 조용히 낮잠을 자고, 어른들은 둥치에 기대어 한숨 자거나 책을 읽는 풍경이라니! 세상에, 이것보다 완벽한 상황은 없다고 23개월 딸 키우는 아빠의 심장이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들은 사과 따먹고 가지 흔드는 나무가 좋단다. 요 발랄한 꼬맹이들도 나이를 먹고 부모가 되면 바뀌려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떤 문장, 어떤 그림이라도 좋다. 확실한 건 이 책을 읽으면 나무가 좋아지는 느낌이 팍팍 꽂힌다는 점이다. 혹여 내가 다른 사연으로 나무를 사랑한다면 이야기 뒤에 덧붙여도 괜찮겠다. 나무는 좋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