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교실29] 귓병 걸린 담임을 좋아하는 이유
[로또교실29] 귓병 걸린 담임을 좋아하는 이유
"자기야, 베개에 이상한 거 묻어있어!"
아내의 놀란 목소리에 잠을 깨니, 베갯잇에 누런 얼룩이 남아 있었다. 색깔은 코 같기도 한데, 왼쪽 귀가 먹먹하게 잘 안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귀에서 나온 고름이 분명했다. 나들이 가려던 계획을 접고, 주말 진료를 보는 이비인후과를 급히 찾았다. 귓속을 찬찬히 보던 의사가 혀를 찼다.
"귀 청소 자주 하시죠? 외이도염이 아주 심하게 왔어요. 면봉 쓰시면 안 돼요."
며칠 전, 귓속이 간질간질해서 면봉으로 귀를 세게 후볐더니 금방 귓병에 걸리고 말았다. 독한 약을 받아 들고 병원 건물을 나서는데 출근할 걱정이 앞섰다. 염증이 난 자리에서 진물이 흘러나와, 귀마개를 착용한 듯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에 넣는 약까지 받아왔다.
'전담도 없이, 5교시를 내리 해야 하는데 수업을 어찌 하나?'
다음 날 줄줄 흐르는 고름은 멈췄지만, 여전히 귀안은 솜뭉치를 박아 넣은 듯 답답했다. 소염 진통제와 항생제, 제산제가 든 약봉지를 입안에 털어 넣고 교실로 올라갔다. 수업을 시작하기 앞서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당분간 선생님 왼쪽 귀가 잘 안 들립니다. 부를 때 잘 못 들을 수 있어요."
1교시는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야기를 간추려야 하는 국어시간. 자연히 오가는 문답이 많았는데 부반장 상윤이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 물으니 선생님 자세가 특이하다고 했다. 왼쪽 귀가 안 들리니 나도 모르게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다 고개를 돌려 아이들과 눈을 일일이 마주치며 듣다 보니 상윤이에게는 그 장면이 낯설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침의 불안한 마음도 잠시 아이들은 수업을 잘 따라왔다. 이어지는 수학 시간, 바둑돌을 똑같은 개수로 묶으며 나눗셈의 기본 원리를 알아보는 수업이었다. 상영이가 문제를 풀다가 몰라서 수학익힘책을 들고 왔길래,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줬다. 대답 소리가 희미해서 머리를 연신 상영이 쪽으로 가까이 대었다.
"선생님 너무 붙지 마세요. 머리 박을 것 같아요."
상영이는 대답을 그렇게 했지만 두어 번 머리를 살짝 부딪히기도 하면서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상영이를 보고 건율이와 서진이도 따라 했다. 이윽고 점심시간, 급식 차례를 기다리며 아이들 뒤편에 서 있는데 원건이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원건이 손은 참 작다. 두 손이 내 손바닥에 모두 들어간다.
"선생님 손은 제 손보다 더 따듯하네요."
그러자 지환이랑 건율이도 담임의 거친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생전에 애교 안 부리는 사내 녀석들이 곰살맞게 구니 기분이 묘했다. 귀가 안 들려서 평소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몸을 기울였을 뿐인데 아이들은 그것을 관심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어지간히 떠들어도 담임이 모른 채 넘어가 주니 신났던 탓도 있었으리라.
밥 먹고 와서 교실 의자에 앉으니 이번에는 성욱이랑 산하가 교실 뒤편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두 녀석이 말하길 애들이랑 팽이 시합을 하는데 그냥 하면 흥이 안 나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우승 상품으로 사탕 하나만 내주십사 부탁을 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까 수업 잘 들어준 꼬마들이 예뻐서 막대 사탕 하나를 건넸다. 빨간 사탕 하나에 신이 난 머슴애들은 미친 듯이 "고~ 슛!"을 외치며 팽이를 돌렸다.
남학생들은 사탕 하나 먹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잘한다!", "KO!" 추임새를 넣어주니 그야말로 팽이 시합장 주변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 5교시를 준비하려는데 우승 상품으로 사탕을 거머쥔 산하가 기뻐서 방방 뛰며 말했다.
"선생님이 매일 오늘 같으면 좋겠다."
"나도 나도. 쌤~ 내일 또 팽이 해요."
우리 교실의 작은 팽이 시합장. 열기만은 대단하다.
얼떨떨했다. 외이도염 진단을 받았을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문득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예전에 두 귀가 잘 들린다고 건성으로 아이들 말을 들었을 것이다. 또 애들이 조금 심하게 장난치면 시끄럽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고, 채점을 하며 장난스럽게 머리를 부딪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자 양쪽 귀가 온전해야 좋은 것인지 한 귀로 정성스레 듣는 것이 좋은 것인지 헷갈렸다. 올해로 교직 9년 차,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내가 그간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나 보다. 귓병이 괜히 온 게 아니다. 애들한테 잘 하라는 몸의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