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읽고 얘기하고픈 책5] 이렇게 애 키워도 다 괜찮다
이렇게 애 키워도 다 괜찮다
변산공동체에 사는 가을이 엄마 신혜경의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
"여보~ 육아휴직급여를 2배 올려준대. 자기도 이참에 쉴래?"
"9월에 둘째 나오는데 공약대로 되려면 시간 꽤 걸릴걸."
대선 공보물이 도착하던 날, 우리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각 후보의 보육 정책을 살폈다. 애 키우는 집에서 1등 관심사는 단연 육아다. 우리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절대로 남들처럼 애한테 안달복달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큰 애가 태어나고 산후조리원에 2주간 머물면서 우리 아이가 이미 경쟁사회에 던져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자기 자식에게 조금 더 잘 해달라고 간호사에게 간식을 넣는 옆 방 아주머니, mm단위의 키와 g단위의 체중을 비교하는 면회객들, 무슨 기저귀 어떤 분유가 더 좋다는 조리원 동기 아주머니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치열한 경주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부질없는 경쟁에 휘말려서 삶을 메마르게 하지 말자고 아내를 위로했지만, 남들보다 딸을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마음 한가득이었다. 하정*, 서천*, 오은*, 신의*, 김수*... 저명한 작가들이 쓴 육아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전문가의 지침을 따르려 노력했지만 안 지켜지는 날들이 당연히 훨씬 많았다.
칭얼대는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아이와 놀아주다 말고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아내가 없는 틈을 타서 아이에게 유튜브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고 맥주를 마시거나... 그럴 때마다 내가 육아 알파고도 아닌데 어떻게 완벽하겠냐고 변명을 해보았지만 죄책감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모순적인 나에게 신혜영 씨의 육아를 다룬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는 꽤 유용한 변명거리가 되었다.
공동체가 있어 가능했던 육아 ⓒ보리
저자 신혜영 씨는 스물네 살 때부터 변산공동체에서 살고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결혼하고 딸 가을이를 낳았다.
가을이 엄마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2학년이 되도록 글씨를 떼지 못한 가을이가 글씨를 가르쳐 달라고 해도 엄마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도 누가 가르쳐 준 적 없어, 그냥 저절로 알게 됐지."
부모들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그림책 읽어주기도 친한 대학 선배의 구박을 받을 때까지 안 한다. "나중에 글 배워서 네가 읽어."라고 말한다. 어린애한테 책 읽어주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좀 못됐다고 생각이 들어도 자기가 싫은 일을 억지로 참아가며 굳이 하지 않는다.
결국 그림책은 가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나서야 엄마와 함께 읽는다. 저자가 꾸준히 살아가는 기록을 글로 남기는 사람이고 영화 마니아인걸 고려해보면 진짜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힘들면 안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위선적으로 온갖 변명을 대며 자기를 포장하거나, 엄마도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난 가을이가 행복해 보인다. 너 행복하냐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내 어릴 적보다 행복해 보인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야무져 보인다. '내가 신경 써 주지 못해도 어쨌건 잘 지내잖아?' 하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다. 난 가을이만 할 때 정말 안 행복했다. 옷도 깨끗이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늘 챙겨 주는 엄마가 있고 부모가 이혼한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 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주 불행하다고 느꼈다. 어린아이도 그런 생각을 한다. - 본문 76쪽 -
가을이는 5학년이 되도록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공동체 학교에서 구구단을 강요하지 않고 시험을 치지 않으니 굳이 안 외우고 필요성을 느낄 때까지 있는 것이다. 가을이 엄마는 구구단을 왜 외워야 하는지 고민한다. 가을이한테도 구구단을 배워 두면 편리하다고 말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저자는 공동체에서 검정고시 준비하는 아이들 수학 공부를 봐준다. 또 가을이가 크고 나서는 근처 학원에 나가 하루 4시간 초, 중등 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고 한 달에 70만 원을 받기도 한다. 남 가르칠 시간에 제 자식 구구단이나 떼게 하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자는 공부는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가을이가 하고 싶어 지면 자연스럽게 할 거라고, 딸 인생이 내 인생은 아니라고 굳게 다짐한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엄마 때문일까? 가을이는 씩씩하고 당차다. 중학생이 된 가을이는 "가을. 내 말 좀 들어 봐. 엄마가 평생 당할 개무시를 한 달 동안 다 당했어."라고 하소연하는 엄마 이야기를 다 들어준다. 또 공동체 학교에서 몇 주 만에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의 개드립이 정말 그리웠다고 말하며 능청을 떤다. 밭도 잘 매고, 방 청소도 깨끗이 하고, 고양이를 살갑게 돌보는 가을이가 너무 좋아서 엄마는 '네가 없으면 난 흘러내릴 거야.'라고 고백한다.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 초반부를 읽을 때는 가을이 엄마가 무책임하고 뻔뻔하다고 생각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사는 데 정답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든다. 자기 앞가림하는 가을이와 자기 인생에 만족하는 엄마. 이거면 된 것 아닐까? 겨울에 좀 춥고, 여름에 김매느라 비지땀을 흘려도 두 모녀는 덤덤하다. 애가 타는 건 독자뿐이다.
"나 멘붕 왔다. 나 일 못 한다."
"콩, 팥, 양파, 감자, 풀, 강낭콩, 못해, 죽어 버릴 거야!"
"난 못 할 거야, 난 망했어, 하기 싫어, 못해!"
나는 이런 말들을 내 딸 앞에서 할 용기가 없다. 적당히 강하고 뒷바라지해주는 아빠로 남고 싶다. 그래도 가을이 엄마는 참 다행이다. 엄마가 저런 말들을 해도 "쯧쯧, 멘붕이 제대로 오셨구만."하고 흔들림 없이 제 할 일 하는 딸이 있으니까. 아이랑 함께 자라는 엄마, 제목 한번 잘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