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9] 행복한 우리 가족
개념없는 민폐가족, 지켜본 초딩들 반응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9] 한성옥 글, 그림 <행복한 우리 가족>
"너는 꿈이 뭐니?"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우문현답. 매년 진로 적성검사를 하며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묻는데, 경춘이가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경찰, 의사, 요리사 따위의 대답을 기대하던 나는 잠시 받아 적던 종이와 펜을 놓고 경춘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배시시 미소 짓는 녀석의 천진한 얼굴에는 계산이 없었다.
행복. 왜 이것을 놓치고 있었을까? 11월이 다 되도록 이 중요한 감정에 대해 아이들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누구나 바라면서도 정작 쉽게 외면하는 행복한 삶을 우리만의 관점으로 나누어 보기로 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고 하던데, 우리 반은 한성옥의 <행복한 우리 가족>을 읽고 답하며 행복에 대한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다.
강렬하고 선명한 붉은색 표지. 제목은 '행복한 우리 가족'인데 어째 큼지막한 폭탄이 글자 '족' 받침 기역자 밑에 길게 매달려 있다. 속지엔 '뻥'이라고 굵은 붓으로 쓴 흰 글씨가 두 페이지에 걸쳐 칠해졌는데, 도대체 이 작가가 말하려는 행복이 뭔지 궁금해진다.
오늘은 엄마 아빠랑 미술관으로 봄나들이를 갔다.
이야기는 소연이의 일기장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냉장고에 '웰빙 Life'와 '유기농 식품' 관련 안내장을 붙이고 사는 소연이네는 단란한 중산층 가정이다. 엄마는 도시락을 준비하고 아빠는 카메라를 챙기는 동안 소연이는 김밥을 먹으며 기다린다. 여유로운 주말의 풍경이다. 이 정도면 행복한 집안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한참이나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가 이런 이유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문학동네어린이
- 아차! 핸드폰! 엘리베이터 좀 잡고 있어!
- 엄마 빨리 와!
엄마가 집에 폰을 찾으러 간 동안 이웃집에서 누가 나오려 한다. 소연이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버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아빠는 나올 의향이 없다.
"우리 아파트에서 저러면 욕먹는데..."
"가끔 그럴 수도 있지."
호동이가 약간 핀잔을 놓자 비슷한 경험이 있는 애들이 소연이네를 편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소연이 가족은 짐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마트로 향한다. 트렁크에 실려있던 종이가방을 쓰레기봉투 더미에 대충 끼워놓고 부릉부릉 달려가는 승용차 안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 엄마 얼른 가져와!
소연이 엄마가 마트에서 또 사람들을 기다리게 한다. 계산대에 소연이를 세워두고 물을 가지러 간 모양인데, 뒤로 선 손님들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중 아저씨 한 명이 험상궂게 쏘아붙이자 소연이 엄마의 낯이 붉어졌다.
"저러면 안 되지!"
"홈플러스 가니까 저럴 때 뒤에 사람 먼저 계산하라던데."
아이들 대여섯 명이 비슷한 경험을 떠올렸다. 대부분 기다리는 시간이 짧았거나 뒤에 선 이들이 먼저 계산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무리가 없었다고 했다. 어쨌든 소연이네가 이제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트의 부끄러움도 잠시, 도로에 나온 소연이네 빨간 승용차는 노란색으로 두 줄 그어진 중앙선을 무시하며 과감하게 유턴한다. 능숙한 운전실력에 스스로 감탄했는지 소연 아빠는 안면 가득 미소를 짓고, 따라오던 파란 차도 얼씨구나 같이 유턴한다.
소연이 아빠는 과속 단속 카메라의 작동 상태까지 꿰고 있다. ⓒ문학동네어린이
- 와! 우리 차가 더 빠르다~
- 여보, 저기 단속카메라!
- 아마 저거 가짜일 걸~
제한 속도가 시속 90km인 도로. 시속 130km로 달리는 자동차는 소연이가 놀랄 만큼 빠르다. 단속 카메라 벌금이 무서운 아내의 말에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그에게 이런 상황은 일상인 것이다.
-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 여보세요~ 응, 식구들하고 놀러 가는 중이야. 고속도로라서 괜찮아. 통화해도 돼.
쌩쌩 지나가는 알록달록 봄꽃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아빠와 친구의 운전 중 전화 통화는 정겹다.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퍽이나 행복하겠다.
"쟤가 밖에 손 내밀고 있어요! 어디 부딪치면 손 부서진다던데."
"차 몰다가 통화하면 벌금 내야 돼요."
아버지가 경찰인 석원이가 콕 집어낸다. 이런 문제를 두고 석원이가 말문을 열면 아무도 반박하지 못한다. 뭔가 확실한 정보라는 믿음이 담긴 말투다. 아까 분명 어디 구석에서 '우리 아빠도 전화한'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어디론가 사라졌다. 드디어 미술관에 도착한 소연이.
- 엄마는 오늘도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느라 바빴다.
- 거기 뒤에 비켜 주세요~ 조각 옆으로 좀 더 붙어 봐. 됐어! 자, 김치-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정이 있는 소연이 부모님은 딸에게 직접 작품을 손으로 느껴보게 한다. 행여라도 배움이 덜할까, 소연이 아빠는 좀 더 바짝 붙으라고 부추긴다. 이렇게나 열성적이고 우애 넘치는 가정이라니!
"우리 엄마는 전시된 거 만지면 돈 물어줘야 된다고 못 만지게해요."
"그게 정상이야. CCTV 다 찍혀!"
이쯤 되자 소연이네 정체는 다 드러났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두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더니, 눈을 샐쭉하게 뜨고 책을 노려 봤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식이었다. 희미한 흥분과 두근거림이 흘렀다. 그림책 속 가공인물이 공공의 적이 되는 상황이 되니 우리는 똘똘 뭉쳤다. 책장 넘기는 선생의 손도 씩씩해졌다.
- 야외에서 먹는 엄마 김밥은 진짜 맛있었다.
- 아이 참 왜 자꾸 떨어지냐~
슬슬 배가 고파지는 점심시간, 평온한 표정의 소연이 가족은 잘 정돈된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깐다. 외부의 출입 흔적이 없는 깨끗한 풀밭엔 '음식물 반입을 하지 맙시다'라는 팻말이 하나 걸려 있는데 아마도 소연이네 가족은 못 봤을 거라고 믿고 싶다.
잔디를 밟고 오는 아버지를 소연이와 엄마는 격려하고 환영한다. ⓒ문학동네어린이
"야야!! 잔디보호라잖아! 김밥이 잘도 넘어가겠다."
"아빠가 브라보콘이랑 커피도 사들고 왔어요."
식사 시간을 언제나 손꼽아 기다리는 종헌이가 선글라스를 가슴팍에 턱 걸치고 의기양양 걸어오는 소연이 아빠를 가리켰다. 종열이가 남편에게 따봉을 날리는 소연이 엄마를 따라 한다. 그것도 그냥 따봉이 아니라 양손으로 하는 쌍 따봉이다. 개념이 있니 없니, 제정신이니 아니니, 분노의 언성이 서늘한 가을의 교실 공기를 데웠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였다. 이런 방식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다니!
- 시간이 되어 우리는 연극을 보러 갔다. 제목은 <소공녀>였다.
- 식사하고 들어가죠. / 신난다! 아빠, 나 떡갈비!
공연 중 친구와 시시덕거리며 수다 엔도르핀을 가득 채운 소연이는 출출해진 모양이었다. 공연장을 나온 소연이네 자동차는 폐지 수거하는 노인 곁을 재빨리 스쳐간다. 그 바람에 리어카에 담겨 있던 종이 몇 장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떡갈비는 진짜 맛있었다. 하지만 옆자리 꼬마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되게 시끄럽고 제멋대로였다.
- 애들 간수 좀 하지.
옆 테이블 꼬마가 소연이네 테이블에 턱을 괴자, 소연이와 부모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밤늦게 아파트 단지로 돌아온 소연이 가족은 마침 비어있는 주차공간인 장애인 칸에 차를 집어넣는다. 남들이 일부러 비워놓은 하얀 휠체어가 그려진 주차칸으로 빨간 차가 들어갔다.
"제대로 찾아갔네."
연지의 말에 다들 빵 터졌다. 소연이의 일기장 마지막은 오늘이 너무 즐거웠다고 적혀있었고, 내일도 또 놀러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 장에서 형우는 공포스러운 듯 목을 움츠리며 떨었다. 동생이 둘이나 있어 늘 양보하고, 참고, 챙기는 것이 습관이 된 형우에게 소연이 가족의 생활은 지켜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주 지들끼리만 행복한 가족이네."
영균이의 사이다 발언에 이어 얄밉다, 카메라로 찍어서 알려주고 싶다, 가르쳐야 한다 등 소연이네 가족에 대한 온갖 처방들이 들끓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오는 아동심리 전문가처럼 자못 진지한 음성이었다. 사실 전문가 흉내를 내는 이 꼬마들도 평소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작품에 푹 빠져 소연이를 걱정하고, 고쳐주고 싶어 했다. 애들이 보기에도 '이건, 아니올시다.'였으니까.
"그런데 소연이처럼 살면 진짜 행복할까요?"
소연이네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연주가 조용히 물었다. 연주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소연이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적어도 본인은 행복할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연주는 조금 달랐다. 소연이도 친구가 있고, 가까운 어른들이 있을텐데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겠냐고 했다. 주변에서 죄다 소연이를 미워하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덧붙였다.
끄덕끄덕, 또래 관계를 중시하는 여학생 무리의 고개가 먼저 움직였다. 4학년 소녀들은 친구의 선택에 예민했다. 반면 원석이를 중심으로 한 남자 그룹은 반대했다. 남에게 예쁨 받고 살려면 눈치를 봐야하고, 비위를 맞춰야 하니까 행복하지 않다는 게 주요 논지였다. 타인이 시킨대로만 살면 괴로울 거라는 말에 다시 한번 대세가 기우뚱.
여러 말들이 오갔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논박에 지친 아이들은 선생님이 판단해 달라고 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교사가 '행복은 ㅇㅇ이다'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아이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머리를 맞대로 충분히 고민하면서, 깊고 치열하게 생각하기를 바랐다. 어린이들은 말이 없는 담임을 답답해 했다.
정원이가 행복이 원래 이렇게 복잡한 거냐고 툴툴거렸다.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는 그간 행복을 너무 막연한 감정으로 대해왔다고. 그래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행복한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지금이라도 곰곰히 정리해보자고 했다.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는 정원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하교할 때까지 꽤 많은 아이들이 정원이 같은 표정을 하고 다녔다.
행복에 대해 명확하게 무엇이다 말할 수 없지만 다들 행복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행복한 우리 가족>을 처음 읽기 시작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당연한 결과였다. 행복은 누군가가 가르쳐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꾸준히 살피고, 행복한 순간들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행복한 삶이 소중한 건 그만큼 행복을 찾고 지키는 과정이 어렵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