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겐 만세, 왕은 천세"... 그럼 선생님은?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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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4 04:05
5학년 2학기 사회는 가르칠 게 많다. 한 학기 내내 역사를 다루는데 시기가 무려 고조선부터 6.25전쟁까지다. 한 차시 분량도 상당해서, 말의 빠르기가 다른 교과에 비해 1.2배속으로 증가한다. 나는 다분히 현실적 이유로 힙합 가수가 된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고, 견훤은 후백제를 세웠지. 궁예는 신하를 의심했고, 견훤은 아들을 의심했지."
"선생님 랩 하세요?"
내용이 많다 보니 관련있는 개념끼리 묶게 되는데, 묶다 보면 운율이 살아난다. 귀족의 부정부패, 사치와 향락이 넘쳐나는 통일 신라 말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신명이 났다. 이게 음악의 힘인가 싶었다.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진골! 성골! 누가 자기 가문에서 왕을 배출할 것인가. 권력에만 눈이 멀었지. 마을에서는 농민이 굶어 죽는데."
"그럼 사람들이 다 죽나요?"
"그냥 죽으면 억울하지. 어떻게라도 살려고 도적이 되거나, 새롭게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 편에 붙는 거지. 망해가는 나라는 꼴이 다 비슷해. "
"신라 콱 망해라."
지난주까지만 해도 신라 통일의 영웅 김유신과 김춘추의 팬클럽이었던 아이들은 신라의 멸망을 주문했다. 흐음, 앞으로 고려도 망할건데 그때는 또 어떡하려고. 비어있는 아이돌의 자리를 차지한 건 고려의 개국 군주 왕건이었다.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은, 백성의 신임을 얻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워. 그런데 고려를 세우고 한반도를 통일할 때까지 무려 18년이나 더 걸려."
"아빠가 보는 드라마 봤어요. 최수종 아저씨가 왕건이라던데요."
"최수종은 아니, 왕건은 호족들의 군사력과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결국 후백제와 신라를 통일하지. 그 과정에서 호족과 결혼으로 관계를 맺느라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고 해. 자식은 아들만 25명이고!"
흥부도 울고 갈 왕성한 자손 생산 능력 앞에, 아이들은 감탄했다. 역시 왕건은 이름값을 한다나. 도대체 왕건을 평소에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한다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교과서에 실린 왕건 청동상 사진에 주목했다. 왕건이 머리에 쓰고 있는 통천관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황제에게는 만세를 부를 수 있지만, 왕에게는 천세라고 밖에 할 수 없어."
"그럼 세종대왕한테 만세 하면 안 되나요?"
"당시에는 만세라고 못 했지. 중국에 있는 황제만 쓸 수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황제에게는 폐하라고 해도 되지만, 왕에게는 전하라고 해야 돼."
"왕건에게는 폐하라고 해야 하나요?"
"조금 애매한데, 왕건은 황제라고도 했다가 왕으로 낮추기도 하고 그랬어. 상대를 봐 가면서 그랬겠지."
아이들은 중국식 예법에 짜증을 냈다.
"치사하게 한 나라의 왕이면 만세라도 부르게 해 주지, 그걸 또 차별하고 그러냐."
"약소국의 설움 아니겠니."
"선생님 그러면 백세! 이런 거도 있어요?"
"글쎄. 아직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권력의 정도에 따라 마지막 자리에 붙은 0을 하나씩 지우면 되니까 조선시대 관찰사 정도 되면 "백세!" 이래도 되지 않을까?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선생님 십세!"
"맞아, 선생님 정도면 십세가 적당해."
"십세! 십세!"
"웃긴데? 선생님 십세!"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나의 권위에 걸맞는 구호를 합의했다. 그 결과 나는 천세에서 0을 두 개 지운 '십세 선생'이 되고 말았다. 십세 선생은 발음이 중요해서, 자꾸 듣고 있으면 욕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 십세! 십세! 사랑하는 제자들이 나에게 포악무도한 짓을 할 리 없다고 확신하지만, 귀가 간지럽다. 몇몇 목소리는 분명 십세의 십을 된소리로, 명백한 웃음기를 실어 발음하고 있는 것 같은데... 흠, 기분 탓이겠지.
차라리 영점 일세가 더 나았으려나. 작은 칭찬에는 언제나 약간의 모욕이 들어가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