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 23] 피터 레이놀즈 글, 그림 <점>
미술 시간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교실에는 손 빠른 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작품 구상하는데 2시간을 넘겨버리는 '만만디'들이 소리 없이 숨어있었다. "아직 다 못한 사람 있나요?" 해도 조용히 있다가 일일이 명단을 점검한 후에야 "아 맞다, 깜빡했다." 하며 슬금슬금 나오는 천연덕스러움.
만만디 대장급인 우리 반 D는 "세상 뭐 그리 서두르오, 꼭 결과물이 있어야 하오?" 같은 느긋함과 관심 없음으로 일관했다. D에게 이성적 설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틀 더 여유를 주어도 작품은 늘 제자리였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결국은 담임이 달라붙었다. 일주일 중 하루는 방과 후에 D와 함께 미술 작업을 했다.
"다음에는 조금만 서둘러 보자."
없는 시간 쪼개어 가까스로 작품을 마무리하면 눈곱만 한 기대를 가지고 D를 구슬렸다. 비장의 무기 밀크 초콜릿을 동원했다. 그럼 뭐하나, 태평스러운 만만디는 애매하게 턱 긁으며 당분을 섭취하고 땡이었다. 무거운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만만디 스트레스가 나만의 문제인 줄 알았다. 피터 레이놀즈가 쓰고 그린 <점>을 읽기 전까지는. 처음 다섯 쪽을 읽는데, 심장이 들먹들먹 울렁거렸다. 바로 미술 만만디 이야기였다.
전형적인 미술 만만디와 교사 ⓒ문학동네어린이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 만만디로 추정되는 여자애가 교실에 앉아있다. 도화지는 깨끗하고 아이는 책상을 외면한다. 대충 봐도 감이 왔다. 지난 9년 간 숱하게 보아 온 장면이었다. D를 힐끗 보았으나 D는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면이라는 듯 태연했다. 베티(그림책 속 만만디)에게 다가온 미술 선생님은 하얀 종이를 들여다본다.
"와!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그렸네."
자상한 선생님을 축복으로 여길 법도 하지만 베티는 차갑게 받아친다.
"놀리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못 그리겠어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 보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베티는 연필을 잡아 도화지 위에 힘껏 내리꽂는다. D는 만만디이긴 했어도 공격적이지 않는데, 베티는 장난이 아니었다. 순간 직업병이 도져 미술 선생님의 심기가 걱정되었다. 교사는 인내심이 끊길락 말락 하는 순간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다행히 베티의 미술 선생님은 흥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까만 점이 찍힌 도화지를 한참 살펴본다. 그리고 종이를 사나운 만만디 앞에 내려놓으며 이름을 쓰라고 한다.
"그러죠, 뭐. 그림은 못 그리지만, 내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고요!"
일주일 뒤 미술시간, 베티는 선생님 책상 위 액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번쩍거리는 금테 안에 베티가 억세게 내려 찍은 점 하나가 선명했다.
원인과 결과, 사소한 배려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문학동네어린이
"우와!"
D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멀리 게시판에 걸린 D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담임 작품인지 D 작품인지 헷갈릴 만큼 선이 뒤엉켜있었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D를 돕는답시고 몇 번 그었는데, 새로이 보니 화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케치 마친 후 D에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밑그림은 같이 했으니, 색칠은 혼자 힘으로 해봐."
D는 마지못해 마른 붓으로 물감을 뻑뻑 발랐다. 스케치가 의미 없어지는 거칠고 무성의한 채색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교과 평가자료로 쓰려면 색칠까지 마쳐야 했으므로 꾹 참았다. 마침내 D는 담임이 요구한 최소 조건을 모두 갖추고 나서야 귀가했다.
D자리에 베티가 있었다면 붓으로 종이를 뚫어버렸을 것이다. D랑 눈이 마주쳤다. D가 덤덤한 눈길로 "베티 미술 선생님이랑 우리 선생님 바꿔줘요."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서둘러 금테 두른 액자를 발견한 베티 뒷이야기로 넘어갔다.
"흥! 저것보다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어!"
베티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오기로 똘똘 뭉친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수채화 물감을 꺼내어 점을 그리기 시작한다. 노란 점, 초록 점, 빨간 점, 파란 점을 그리더니 색과 색을 자유롭게 뒤섞었다. 베티는 쉬지 않고 여러 가지 색깔로 작은 점들을 아주 많이 그렸다.
표정이 한결 밝아진 베티는 넓은 도화지에 큰 붓으로 커다란 점을 그리기도 하고, 심지어 색칠을 하지 않고도 커다란 점을 만드는 경지에 이른다. 점 예술가로 거듭난 미술 만만디는 전시회에서 사람들의 호평을 받는다.
베티의 점 그림들 ⓒ문학동네어린이
'혹시 우리 D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만 바뀌면 되잖아.'
성장하는 베티를 보며 희망이 가슴속에 점점이 퍼져나갔다. 돌아오는 미술 시간을 노렸다. 모둠 친구들이 열심히 종이 인형을 만드는 동안 역시나 D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D가 아무것도 안 하자 짝꿍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덕택에 D는 인형의 팔과 다리로 추정되는 종이띠를 자를 수 있었다.
어떤 말로 D에게 희망을 줄지 고민했다. 적당한 말을 준비한 뒤 D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작업을 마친 아이들이 인형을 사물함 위에 전시하고 자리를 뜨자 D도 슬며시 따라가는 게 아닌가! 온화했던 내면에 먹구름이 끼었다. 첫 시도를 망칠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다정히 D를 불렀다.
"D야, 화장실이 무척 급했나 보구나. 인형이 머리를 붙여달라고 찾는 것 같던데. 하하."
D는 시무룩하게 의자로 돌아와 가위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인형을 만들어보라 하였으나, 만만디는 불행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손만 꼼지락거렸다. 베티처럼 점이라도 찍으면 좋으련만 D는 딴짓만 했다. 30분이 지나도록 종이띠는 그대로였다. 종이띠를 인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종이 아래에 이름을 써 줄래?"
예쁘게 꾸며진 종이 인형들 사이에 D의 종이띠가 놓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D는 베티처럼 더 멋진 종이띠를 만들겠다며 오기를 품지 않았다. 새로운 종이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가위질도 안 했다. 이상은 뜨거웠으나, 현실은 냉정했다. 다만 D가 종이띠 인형에 사인펜으로 웃는 얼굴을 그려 넣은 걸 위안 삼았다.
D가 베티처럼 행동하기 바라는 마음을 접었다. 대신 미술 시간에 D 옆에 더 자주 갔다. 그리고 어떤 상태로 작품을 가지고 오든 이름을 적어서 전시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D는 여전히 미완성작을 들고 왔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색종이 한 번 더 접혀있고, 연필 자국 더 나있었다.
2학기 마지막 미술 시간, D는 자신이 그린 클림트 풍 기린이 게시판에 걸리는 걸 확인하고 집에 갔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돌아서는 녀석의 얼굴에서 얼핏 베티를 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