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 인종차별에 충격받은 초등학생
버스 안 인종차별에 충격받은 초등학생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 22] 니키 지오바니 글, 브라이언 콜리어 그림 <일어나요, 로자>
학창 시절 나는 교실 뒷문으로만 다녔다. 앞문으로 다닌 적이 없다는 기억이 교사가 되고 나서야 이상했다. 앞문은 선생님 전용이었다. 문의 크기와 형태, 색깔은 뒷문과 같았으나 "이게 규칙이야"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기분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아 늘 교실 뒤편으로 출입했다.
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그 규칙은 어디에 적혀있는 것일까? 교칙 조항을 꼼꼼히 읽어 알고 계시는 선생님이 정말 얼마나 계셨을까? 이런 의문도 자란 후에나 들었지, 순종하는 삶에 길들여져 있던 모범생은 의심조차 품지 못했다. 아니, 감히 선생님 권위에 도전해 질서와 안정을 깨트리는 모든 존재들을 무시하고 때로는 경멸했다.
왜 학생들과 따로 밥 먹고, 교사 메뉴가 별도 마련되어 있던 급식실을 당연하게 넘겼을까? 본인은 실내화 신고 운동장에 나가면서 학생들에게 신발 갈아 신기를 요구하는 선생님을 왜 옳다고 여겼을까?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괴로웠다. 이럴 게 아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담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해야 했다. 구구한 사연을 들려주기보다 <일어나요 로자> 읽기를 택했다. 이 책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흑인 일류 재봉사 로자 파크스, 여기에 흑인은 붙일 필요가 없는 말이다.ⓒ 웅진주니어
1955년 12월 1일 아침, 로자 파크스는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는 감기 기운이 떨어져 이른 식사를 했고 남편 레이먼드 파크스는 이발 기술을 인정받아 추가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12월의 첫날이었다. 백화점 수선실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로자도 분주해졌다. 일류 재봉사였던 로자 파크스는 연말을 맞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늘과 실을 움직였다.
"일찍 들어가 봐요, 로자. 어머니도 편찮으시다면서요? 어서 가서 돌봐 드리도록 해요."
아직 일을 다 못 끝냈지만 지배인의 배려로 로자는 6시 무렵 퇴근했다. 버스 정류장에 선 그녀는 집에 가서 맛있는 '미트로프'를 만들 생각에 미소 지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로자는 앞문 발판에 올라서서 요금 통에 동전을 집어넣고, 버스에서 내려 다시 뒷문으로 올라탔다.
"왜 버스에서 내려 뒤로 타요?"
"관습이었어요. 그러니까 1955년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버스에서 흑인 전용 좌석은 뒤편이었어요."
과거의 내가 그랬듯, 로자도 뒤로 다녔다. 편견과 차별은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백인과 흑인을 나누고 교사와 학생을 나누면 누군가는 길을 돌아가야 했다. 흑인 전용 좌석은 만원이었다.
로자는 흑인과 백인 누구나 앉아도 되는 공용 좌석으로 향했다. 로자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핸드백과 바느질 가방을 자기 무릎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버스가 몇 차례 서고 다시 가는 동안, 공용 좌석은 흑인 승객으로 채워졌다. 로자는 하루를 정리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버스 기사는 늘 해오던 대로 흑인을 위협했을 것이다.ⓒ 웅진주니어
"거기, 자리 비키라잖소!"
버스 기사의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라 로자는 고개를 들었다. 새로 탑승한 백인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자, 기사가 앞장서 좌석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건너편 공용 좌석에 있던 흑인 둘은 뒤편으로 몸을 뺐고, 옆에 앉은 남자도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다며 엉덩이를 들었다. 로자는 그 남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 뒤, 버스 기사 제임스 블레이크를 흘끗 쳐다보며 도로 앉았다.
"로자 용감하네. 나는 저번에 울진 놀러 갈 때 기사 아저씨가 과자 먹지 말라고 해서 참았는데."
무서운 버스 기사 그림을 보고 지환이가 1학기 현장체험학습을 떠올렸다. 선생님에게 매우 친절했던 관광버스 기사 아저씨는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게 싫어 간식을 못 먹게 했다. 덜렁대다 흘리면 시트 끈적끈적 해진다고 음료수도 못 마시게 하길래, 따져서 물은 허용하게끔 합의를 보았다.
버스 구석구석 스며있는 시큰한 막걸리 냄새와 틈새에 끼어 있는 마른 오징어포를 보며 화가 나 머리 가죽이 뜨끈뜨끈 해졌다. 어른들에게는 술판의 공간이, 어린이에게 금욕의 성전으로 강요되었다.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거, 순순히 일어나쇼!"
"왜 우리가 일어나야 하는 거죠?"
"경찰을 불러야겠군!"
"마음대로 하세요."
로자는 침착하고 힘 있는 말투로 항의했다. 옳지 않은 일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비쳤다. 버스 앞쪽과 뒤쪽에서 서로 다른 웅성거림이 퍼졌다. 피부가 하얀 사람들은 "체포해요.", "버스에서 끌어내요"라고 했고 반대편에서는 "저기는 공동 좌석이잖아. 저 부인도 앉을 권리가 있다고"라며 수군거렸다. 로자는 그대로 앉은 채 경찰을 기다리며 한 해 전인 1954년 미연방 대법원이 내린 '브라운 판결'을 되뇌었다.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내용이었다.
로자는 자신이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인이 먼저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주는 것에 지쳤고, 다른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것에 지쳤으며, 유색인 전용 출입구와 발코니 식수대 전용택시 모두에 지쳤다. '백인 입구'라고 적힌 팻말이 상점거리에 선명했다.
"흑인이라고 따돌림당하는 것 같아요. 근데 왜 흑인을 유색인이라고 불러요?"
"우리도 유색인이에요. 있을 유, 빛 색, 사람 인. 피부가 희지 않고 색이 섞이면 다 유색인이에요."
말을 꺼낸 나영이는 대단히 충격받은 듯했다. 아이들은 핍박받는 로자를 가엾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이건 어디까지나 옛날 사건이고 흑인에게 국한된 문제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피부가 도화지처럼 하얄 수 없는 자신들도 유색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느꼈다. 로자가 탔던 버스 안처럼 자잘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백인들이 잘못했네."
"나는 그냥 한국에 살래."
얼른 다음 페이지를 넘겨 혼란을 잠재웠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노란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성큼성큼 로자에게 다가갔다. 메시지는 간결하고 위협적이었다.
"아줌마, 자리 좀 비키시지?"
"싫습니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이 지긋지긋했던 로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소신을 지키고, 몽고메리 시 조례 6장 11절 '분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이 사건 나흘 뒤인 1955년 12월 5일로 잡혔다. 로자 체포 소식을 접한 여성 정치 위원회(Women's Political Council) 회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로자를 구하기 위해 포스터 3만 5천 장을 찍어 유색인에게 뿌렸다.
사람들은 1년 가까이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진행했다.ⓒ 웅진주니어
'오늘, 버스를 타지 맙시다.'
'버스 승차 거부하여 로자 파크스를 도와 줍시다'
'월요일에는 걸어 다닙시다.'
재판 당일 하루만이라도 버스를 타지 말자는 절절한 호소였다.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버스 이용객의 상당수가 흑인이었다. 일터까지 걸어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물론이고, 백인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내야 하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12월 5일 몽고메리시의 버스는 거의 텅텅 빈 채로 거리를 내달렸다. 버스 보이콧은 성공적이었으나 재판부는 로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우리는 버스 승차를 거부할 것입니다. 정의와 공명정대함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날까지 우리는 모두 걸어 다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버스 보이콧에 참여한 이들은 빗속을 걷고, 땡볕을 걸었으며,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도 걸었다. 걷기가 여의치 않을 때는 서로 조를 짜 카풀을 하고 교회 차량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자 파크스 사건 이후 11개월이 지난 1956년 11월 13일, 버스 안에서의 인종 분리는 불법이라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냈다.
"버스 안 타는 게 엄청 중요한 건가?"
승표가 약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상해보자고 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나라에서 승표나 선생님처럼 안경 쓴 사람들을 차별하는 법을 만들었어. 그래서 우리가 그 법을 없애고 싶어서 1년 동안 걷기만 하는 거야. 그것도 수백만 명이 같이. 굉장하지 않니?"
전국에 모든 근시, 난시, 원시들이 차를 버려두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보았다. "시력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라고 외치며 두 발 쿵쿵거리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어마어마했다. 주먹으로 때리지 않아도 되고, 총부리 겨누지 않아도 된다. 짙은 어둠을 몰아내는 촛불의 물결처럼, 힘없고 여린 사람들이 뜻을 모으면 가능하다.
로자 파크스는 92세로 눈 감을 때까지 '미국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같은 명칭을 부담스러워했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커질 줄 몰랐고, 어쩌다 보니 자기가 한 작은 행동이 부각되었을 뿐이라고 겸손했다. 조용하지만 강인하게, 고결한 인간이 위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