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실, 돈 꾸어 샀던 사연
크리스마스실, 돈 꾸어 샀던 사연
[로또교실32]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어, 충동구매의 추억
'아직도 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있나.'
공문함에 크리스마스실(Seal)이 3장 들어있었다. 쪽지를 보니 강제 판매는 아니고 희망자가 있으면 3000원씩 받고 주면 된단다. 정 살 사람이 없으면 반납하면 되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당부가 진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당연한 얘기이긴 한데 왠지 친절하게 느껴졌다. 올해 컨셉은 '우리의 영웅-소방관'으로 멋지게 불을 끄고, 사람 구하는 소방관 아저씨가 그려져 있었다.
"크리스마스실 살 사람? 결핵 환자 돕는 건데 필요한 사람 있으면 말해줘요."
우표로 편지 부치는 세대가 아니라 그런지 아이들은 실이 뭔지 계속 물었다. 봉투에 붙이는 일종의 장식물인데 결핵이라는 병에 걸린, 폐가 아픈 사람 치료하는 데 쓰인다고 알려줬다. 여기 도계는 탄광촌이라 폐병 걸린 분들이 많다. 어른들한테 하도 들으며 자라서 그런지 도계 어린이들은 호흡기 질환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함성을 지르며 둥그렇게 모여들더니, 그림이 예쁘다고 금방 세 장을 다 사 갔다. 담당 선생님께 9000원을 드리고 나자,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가위 바위 보로 쟁취한 크리스마스 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던 해, 까칠한 우리 반 선생님이 착해지던 날이 며칠 있었다. 학부모가 상담하러 왔을 때 남아서 청소하던 당번에게 그랬고, 양복 입은 장학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교실을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위 경우 손님이 왔으니 그럴 수 있겠다고 짐작했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특이한 사건도 있었다.
"TV에서 피 토하면서 쿨럭거리는 장면 본 사람?"
당시 달동네가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사연 많은 주인공이 피 토하며 기침하는 장면이 흔했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자,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그게 바로 결핵이며 결핵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주머니에서 불쑥 튀어나온 선생님 손에는 빨간색 대한결핵협회 마크가 찍힌 크리스마스실 여러 장이 들려있었다.
"여러분이 이 실을 사주면 결핵 환자들을 돕는 치료비가 됩니다. 누가 따뜻한 마음을 지녔는지 볼까?"
편지 쓰기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하나둘 나오자, 담임 선생님 표정이 확 밝아지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 세례가 쏟아졌다. 여학생 무리가 다녀가고 실은 단 세 장이 남아있었다. 선생님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지갑 열어줄 구원자를 찾으셨다. 우리들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끝내 추가 구매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참다못한 선생님은 크리스마스실이 팔린 개수를 보면 그 반이 얼마나 양심적이며, 훌륭한지 알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셨다. 만일 우리가 이 실을 사주지 않으면 결핵 환자들의 가족이 어떻게 되겠냐며 부르짖으셨다. 연설에 압도되었는지 아니면 답답한 분위기가 견딜 수 없었는지 남자애 한 명이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지폐를 펼치며 나갔다. 이어지는 박수갈채!
웃기게도 그 박수 소리에 혹하여 넘어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였다. 격려받을 일이 드물었던 나는 내일 돈 들고 올 테니 미리 물건 받을 수 없겠냐고 거래 제안을 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의외라는 듯 미소 지으며 실을 넘겨주셨다. 최대한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어서 빨리 귓가에 짝짝 터지는 박수 소리가 듣고 싶었다. 누군가 스타트만 끊어주면 퍼지는 건 순식간일 터였다.
"제가 살게요! 야 이준수! 내가 돈 빌려줄까?"
"그래 그러면 되겠네. 우리 OO이 좋은 생각이야. "
칭찬이 엉뚱한 데로 튀었다. 망할 자식, 그렇게 나는 성급한 놈이 되고 그 녀석은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박수는커녕 졸지에 채무자가 되어버려 기분이 매우 별로였다. 다음날, 선생님은 우리 반이 크리스마스실을 모두 팔아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더불어 약간 통쾌하다는 목소리로 아직 다 처분을 못 해 쩔쩔매는 반이 있다고 슬쩍 언급하셨다. 그땐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반마다 할당된 수량이 있었던 것 같다. 분명 마음 약한 몇몇 선생님들은 본인께서 직접 사셨으리라.
우표책에 보관된 1996, 1998, 2000, 2001년도 씰.
이후로도 나는 꽤 오래도록 실을 사 모았다. 칭찬받는 데 성공했냐고? 글쎄, 여러 해에 걸쳐서 산 걸로 보아 될 때까지 계속 시도한 듯하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건, 결핵 치료에 보탬이 되었으니 만족한다. 생각난 김에 궁금하여 의사 친구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가 여전히 OECD 국가 중 결핵 발생률, 사망률 1위라고 한다. 10만 명당 100명꼴이라는데 먹고 살만한 나라치고는 굉장히 높은 수치라 했다. 실이 매년 나오는 데 이유가 있었다.
내년에 크리스마스실이 또 들어오면 잊지 말고 한국 결핵 감염 상황을 알려줘야겠다. 그리고 반드시 폭풍 칭찬을 날려 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칭찬에 목마른 누군가가 결핵 퇴치사업에 이바지하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