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인생은 2부 리그가 아니란다
“아 몰라, 오답노트 안 해!”
“너 그러면 지잡대 간다.”
내 귀를 의심했다. 열한 살짜리 입에서 ‘지잡대’라니. 수학 문제 틀린 걸 오답노트로 만들어오라고 숙제를 내준 다음 날이었다. H가 숙제를 안 하고 공 차러 운동장에 나가려 하니 친구 J가 한마디 던진 것이었다. H를 나무랄 생각보다 J의 말이 거슬렸다.
“J야, 지잡대가 무슨 말인지 아니?”
“우리 동네에 있는 도캠 같은 데죠.”
‘도캠’은 강원대 도계캠퍼스를 의미했다. J는 컴퓨터 게임 채팅창에서 ‘지잡대’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고 말했다. “선생님도 춘천교대 나왔으니 지잡대 출신이구나”라고 하니, 그 녀석은 얼굴이 붉어지며 배시시 웃었다. 곁에 선 다른 아이들도 “도계가 좀 부족한 건 사실이잖아요” 하며 말을 보탰다.
ⓒ김보경 그림
나는 속이 상했다. 아이들이 자기가 태어나고 생활하는 고향을 낮게 평가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지표에 비추어보았을 때 지방에 있는 대학들의 연구 성과나 교육 수준이 서울의 유수 대학보다 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방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과소평가받을 까닭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전학생이 있는 교실에서도 받은 적이 있었다. 부모가 삼척으로 직장 발령을 받거나 취직하게 되면 자녀들이 함께 전학을 왔다. 이 경우 도계보다 인구가 많고 규모가 큰 도시에서 지내다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학생들은 “예전 학교에서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으로 시작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거기 학교에서는 에버랜드로 현장 체험학습을 가” “여긴 어째 한 학년에 반이 두 개밖에 없냐” “아파트가 안 보인다” “CGV가 없다”…. CGV가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 아이들은 전학생이 말로 그려내는 풍경을 부러워했다. 어쩌다 맞장구치는 것이라고 해봐야 “여기도 GS25 있다” “파리바게트 있다” 정도였다.
도계에는 유리공방이 있고, 포도밭도 많고, 공기가 맑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광고에 등장하는 각종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업체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있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대결이었다. 삼척은 원주에 밀리고, 원주는 수원에 밀리고, 수원은 서울에 밀렸다. 뉴욕에서 전학생이 오지 않는 한 서울이 ‘짱’을 차지하는 구조였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도 있지만 어디 서울만 대한민국이란 말인가. 지방에 사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벌써 ‘지잡’의 삶이 대도시보다 못하다고 인정해버린다. 도계에 남아 있는 청년이 된 언니·오빠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탈시골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지방은 능력이 부족해서 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마지못해 남아 있는 곳이다.
실제 지방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
더 서글픈 건 나조차 ‘우리 고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평생 살아’라고 아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양질의 일자리는 수도권과 주요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문화시설이나 사회자본도 지방은 열악하다. 탄광촌이었던 이곳 도계의 경우, 지난해 대한석탄공사가 단계적 폐업 절차를 밟게 되면서 미래는 더 불확실해졌다. 상담 온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강원도에서 중산층으로 먹고살려면 전문직이나 공무원밖에 없다”라고 하소연한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서 쓴웃음만 지었다.
지방 학생은 1부 리그 무대에 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2부 소속 선수가 아니다. 이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실제 지방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 새 정부의 관심과 노력을 바라는 일개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부탁이다.
- 시사IN 제508호 '학교의 속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