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신발 주으려다 숨진 아이, 실화였네
1980년의 광주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택시운전사, 기자, 시민군, 간호사, 군인... 지금까지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퍼즐처럼 흩어져 있던 광주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초등학교 2학년, 소년의 눈에 비친 5월의 광주는 어땠을까?
9살짜리 손에 이끌려 낯선 도시를 구경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조금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 호기심이 동한다. 그냥 능화초등학교 2학년 1반 정새날 학생의 가이드를 믿고 37년 전으로 가보자. 그림책 <운동화 비행기>는 독자들을 광주 외곽의 한적한 농촌마을로 데려간다. 이번 그림책 여행에는 새날이 보다 한 살 더 먹은 22명의 우리 반 형, 누나들이 함께 했다.
새날이가 살았던 평화로운 마을 ⓒ평화를 품은 책
새날이는 암소가 앉아 있는 언덕 아랫집에서 태어났다. 그 집에서 새날이 아빠가 태어났고, 할아버지도 태어났다. 새날이에게 자기가 나고 자란 마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뒤짱구가 귀여운 새날이는 생일날 운동화 선물을 받는다.
"새 운동화는 자동차가 되고, 보트가 되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나는 비행기도 되지."
고무신을 신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새날이는 마을 길을 내달리고, 개울을 뛰어넘고, 논길을 따라 달린다. 온몸이 땀에 젖어도, 뒷산 너머 저수지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
"어~ 운동화가 좋은 건가?"
휠리스 신발을 즐겨 신는 가연이가 아리송한 눈빛을 보냈다. 물자가 흔한 요즘 아이들에게 운동화 한 켤레는 좋아서 온 산천을 헤집어놓을 만큼 특별한 물건이 아닌 모양이었다. 새날이는 운동화 선물이 날아갈 듯 기뻐서, 신발이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까지 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발가벗고 수영하러 갈 때도 신발을 옷 위에 고이 모셔둔다.
늦봄 따가운 햇살에 데워진 물이 벌거숭이 아이들을 감싸는 5월의 풍경은 그림처럼 포근하기만 하다. 풍덩! 푸웅덩! 여기저기서 머슴애들이 물에 뛰어들며 뒹굴고, 깔깔거리는 소리가 간지럽게 울려 퍼진다. 물속에서는 살 오른 송사리 떼가 소년들 몸에 입을 맞춘다. 그때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탕, 타당!"
군인이 겨눈 총은 아이를 향했다. ⓒ평화를 품은 책
파란 물속에 붉은 피가 번져 나가고, 같이 놀던 아이들은 친구의 죽음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후다닥 숲으로 뛰쳐나갔다. 꼬마들은 벌벌 뛰면서 나무 뒤에 바짝 엎드렸고, 총소리는 몇 번 더 울렸다. 저 멀리 새날이가 떨어뜨린 운동화 한 짝이 놓여있었다.
"새날아, 나오지 마. 너 죽어."
은비가 손바닥으로 입을 감싸며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장난감 BB탄 총에 맞아도 눈물이 줄줄 흐를 만큼 아픈데, 이번에는 진짜 총이 초등학생을 겨누고 있다. 그러나 책 속의 새날이는 은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새날이가 슬그머니 몰래 기어가 운동화를 집으려는데 멀리서 황동색 탄환이 날아왔다.
"타앙!"
새날이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다만 엄마의 울음소리만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아이들은 "헉!"하고 신음을 뱉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 운동화를 품고 캄캄한 땅속에 누워있던 새날이는 찔레꽃 향기에 깨어난다.
"운동화 비행기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어."
새날이는 운동화 비행기를 타고 계엄군을 실은 트럭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줄줄이 도시로 진입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트럭을 따라 쫓아간 광주는 전쟁터다. 며칠 전 새날이 몸속을 관통했던 총알이 시민들을 향해 꽂힌다. 총에 맞은 엄마 옆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아들은 울부짖고, 수많은 아이들의 울음이 온 도시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간다.
"뭐지? 전쟁인가?"
이유 없는 죽음이 당황스럽기는 열 살 먹은 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왜 갑자기 사람들이 총알을 맞고, 고아들이 생겨나는지 의아해했다. 설명을 길게 할 수 없었다. 37년이 지난 지금도 왜 선량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돌이켜보면 울분이 차오르고 먹먹해지는데 10살 먹은 어린이들에게 그 모든 배경을 보여줄 수 없었었다. 일단, 새날이의 운동화 비행기를 따라가기로 했다.
날이 밝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민주주의 만세' 현수막을 내건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먹고, 다친 이들을 감싸 안으며 도시를 지켰다. 그 사람들 틈에는 엄마를 여의고 주저앉아 있던 꼬마도 섞여 있었다. 꼬마가 새날이를 향해 주먹밥을 건넸다.
"너는 내가 보이니? 피해야 해."
새날이의 만류에도, 아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웃으며 고무줄 새총을 꽉 쥔다. 새날이는 주변을 돌아본다. 위험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았던, 용감하고 위대한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보듬는다. 그러는 사이 계엄군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그날 밤 자정 대검이 꽂힌 소총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
민주주의를 지킨 사람들 ⓒ평화를 품은 책
"선생님 이거 실제 이야기예요?"
"응,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야."
아이들 입이 쩍 벌어진다. 갑자기 "계엄군이 뭐예요?", "광주는 어디에 있어요?", "새날이 엄마는 아직 살아있나요?" 라며 폭풍 질문이 쏟아졌다. 대형 화면에 광주 지도를 띄우고 확대해 가니 우리 땅에서 이런 비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운지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렸다.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죽은 아이는 박광범 학생이고, 새 신발 주으려다 숨진 새날이의 본명은 효덕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전재수'라고 알려줬다.
일 년에 다섯 번 있는 수영 수업에서 우리 아이들은 살갗만 까져도 즉각 치료를 받고 휴식을 취한다. 주변에 군인이라 하면 삼척 해안선을 든든히 지키는 23사단 장병들을 떠올린다. 작년 겨울부터 TV에는 촛불 든 시민들이 서울 광장에 모여 노래 부르는 장면이 계속 나왔고, 올해 5월에는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 2017년을 살아가는 초등학생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광주 저래요?"
진지한 류은이 목소리가 귀여워서 웃음이 픽 나왔다. 그렇지 않다고, 광주도 아니고 대한민국 어디라도 이제 그런 곳은 없다고 말해주니 수심 가득한 얼굴이 한결 펴졌다. 하지만 우리가 저분들을 기억해주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돌아가신 마음을 잊으면 언제라도 80년 광주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천천히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생명과 평화를 위해 싸우며, 슬픈 눈물을 흘리는 또 다른 오월이 있다. 새날이가 그냥 운동화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른 게 아니다. 하늘에서 손 흔드는 새날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당신은 아직 총에 맞지 않았으니 건강한 두 다리로 운동화 신고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게 신발끈 맬 힘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5월의 광주가 던지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