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시대를 함께 할 꽤 튼튼한 정신적 밧줄
감염병 시대를 함께 할 꽤 튼튼한 정신적 밧줄
[서평] 변진경, 김명희, 임승관 지음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
올해 벌써 코로나 관련 책을 세 권이나 읽었다. 코로나 사피엔스, 코로나 이후의 세계,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 이 주제, 저 주제를 넘나 들면서 책을 읽는 편이라 단일 소재로 연달아 책을 드는 법이 거의 없는데 코로나19는 달랐다. 나는 진심으로 기후 변화를 우려하게 되었고, 운전대를 놓고 걸어 다니는 거리가 늘어났으며, 일의 목적이 아닌 경우 공공장소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세계가 변하는 폭이 너무 커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새로운 정보에 목말랐고, 변화하는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고 싶었다. 내가 몸소 겪는 생활 영역은 물론이고, 거시적 차원에서 코로나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앞으로의 방향, 마음가짐 따위가 궁금했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에서 접하는 감염병 정보는 당장의 현안을 중계 형식으로 다루는 경향이 많았다. 불안한 마음에 뉴스를 찾아보기는 해도 정보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피로하기도 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읽은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는 꽤 튼튼한 정신적 밧줄 역할을 해준 책이다. 늘어지는 전염병 시국에 슬슬 짜증도 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꾸 남 탓을 하며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때 정신줄을 놓지 않게 해주는 밧줄은 실용적이다.
ⓒ시사IN 저널북
책 제목이 말해주듯, 코로나19는 오래간다. 적어도 몇 년 간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시민으로서 인간성과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에서는 이 큰 주제를 다루기 위해 아홉 개의 이슈를 품고 있다. 팬데믹, 마음건강, 대구, 교육, 언론, 외교, 노동, 공공의료, 인권. 어느 챕터부터 펴 보아도 상관은 없지만 시간 순서대로 이슈가 이어지니 코로나19의 변천사를 정리해 보고 싶은 사람은 앞에서부터 보는 게 좋다.
나는 대구 편을 가장 먼저 읽었다. 신천지 발 대규모 감염이 발생했을 때 무척 격앙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와 가족, 이웃들이 집 밖에도 못 나가고 이렇게나 고생하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화가 났다. 내 감정에 동의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신천지를 비난하는 톤의 기사를 골라 읽고, 직설적인 댓글에 추천을 눌렀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한 집단을 싸잡아 비난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도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런데 '대구' 편을 읽고 나서 낯이 뜨거워졌다. 아래는 전문가 대담의 일부다.
김동은 : "확산 초기에는 중국 출신 이주민들이 집 밖에 잘 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구 경북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쪽방촌 주민들과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를 운영해 오고 있었는데요, 완전히 문을 닫지 않고 원격진료를 했어요. (중략) 발달장애인 같은 경우는 검사하러 모시고 나오는 것부터 쉽지 않아요. 장애인 확진자가 생기면 어딘가에 입원을 시켜야 하는데 병상이 부족해서 다른 지역까지 멀리 보내야 했고요. "- 70, 71p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김동은 교수는 일주일에 세 번 외래진료, 두 번 수술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대구동산병원 코로나19병동과 달서구 선별 진료소에서 자원봉사를 한 의사다. 그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확진자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안실 옆에서 쪽잠을 자는 간호사와 의료 폐기물을 처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휴게실을 걱정한다. 또 국민들이 대구에 보내준 선물과 격력 메시지에 감사를 표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돕고 연대했는지 기록을 남기자는 말로 끝을 맺는다.
나는 대구에 별도의 물품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속 편하게 외부인으로서 도끼눈을 뜨고 비난거리를 찾기 바빴다. 현장에서 동분서주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간절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혐오의 감정이 쑥 내려가는 경험을 했다. 특히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일수록 편견을 가지기 쉽다.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해온 전문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을 발견하게 되고, 기존의 의견을 조정할 여지가 생긴다.
만일 최근의 의사 정원 확대 및 공공 의대 신설 이슈에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의 8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8장의 주제는 '공공의료'다. 우리나라 국민은 코로나19를 계기로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선별 진료소에서 무료로 코로나 검사를 받을 수 있었고, 자가격리가 되더라도 매일 보건소 직원의 안부 전화와 생필품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작동한 보건의료 서비스에 자부심을 느꼈다.
반면 물밑에서는 치열했다. 일선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은 "모래 위의 성 같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공병원의 병상은 턱없이 모자랐고, 보건소, 선별 진료소, 병원 모든 곳에서 일손이 딸렸다. 공공보건의료가 임시방편과 행운에 기대지 않으려면 체계 개편과 확실한 지원이 필요하다. 8장을 따라 읽다 보면 공공보건 체계를 조정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막연히 대중 VS 의료계로 풀어가는 정치적 접근이 아니라서 포털 메인을 도배하는 자극적인 기사보다 신뢰가 간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이야, 완전 사이다네!" 같은 반응은 기대할 수 없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에 갔을 때 눈이 명적응을 하는 것처럼 새롭게 알게 된 지식에 익숙해지느라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렇지만 판단을 내릴 때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접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는다.
코로나19는 단기간에 끝날 사안이 아니다. 14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흑사병 유행은 4년을 넘겼고, 20세기 초에는 인플루엔자가 2년에 걸쳐 인간을 괴롭혔다. 우리는 가늘고 길게 잘 버터야 한다. 마음 한편에 나보다 고생하는 이들을 위한 애틋함을 남겨두는 편이 좋다. 나는 이 책을 내 정신줄을 놓지 않는 밧줄로 잘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