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학생과 이것만은 이야기해보고 싶다
앞으로 수업에 써먹을 몇 년 치 자료가 생겼다. 코로나19다. 갓난아기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전 세계 인류 모두가 강렬한 고통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공통 경험은 사람들의 기억을 한 데로 묶고 나름의 서사와 감정을 만들어 낸다.
교사에게 공통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업 자료다. 아이들에게 스페인 독감을 가르치기는 어렵지만, 코로나19는 쉬울 것이다. 우리는 마스크를 구하려 발을 동동 굴려 봤고, 날씨 확인하듯 일일 신규 확진자 추이를 살피는 날들을 보냈다. 삶과 연결된 배움은 몸에 각인된다.
어떤 식으로든 코로나19는 종식될 것이고, 앞으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재난은 교실 속 풍경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학생들과 이것만은 꼭 나누고픈 코로나19 수업 주제가 두 가지 있다.
왜 우리는 질병에 죄를 묻는가
ⓒ이희훈
첫째는 혐오와 편견이다. 지난 5월 중순 내가 거주하고 근무하는 동해·삼척 지역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관내 외국인 원어민 교사들이 이태원에 다녀온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클럽에는 가지 않았고, 66번 확진자의 동선과도 겹치지 않았다. 그러나 예방 차원에서 해당 원어민이 소속된 학교 교직원 모두가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문의가 빗발쳤다. 지역 온라인 카페를 중심으로 원어민 교사와 학교, TaLK 장학생(한국 농산어촌 지역에서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강사로 활동하는 정부 초청 영어봉사장학생 - 편집자말)을 향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성난 사람들은 실제로 클럽에 간 원어민 교사가 얼마나 되는지, 확진자 동선과 겹치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태원에는 클럽만 있는 게 아닌데 이태원을 거대한 클럽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성소수자라고 단정했다. 원어민 교사와 게이가 연관 검색어로 묶이면서 '욕하기 안성맞춤'인 그림이 연출됐다. 타인을 미워하기는 쉬웠다.
코로나19 검사 절차에 응하지 않는 클럽 이용객은 비판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휴가 기간 외국인이 이태원에 가는 행위가 왜 욕을 먹어야 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젊고, 타국에 고립돼 있으며, 외국인이 자주 모이는 장소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방역 지침에 어긋나는 일도, 이태원이 통제된 장소도 아니었다. 근무 외 시간에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사후적으로 발생한 문제에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원어민 교사들이 이태원을 방문한 기간, 여기 강원도 해안은 전국에서 건너온 인파로 북적였다. 생활속 거리두기 전환을 앞두고 들뜬 분위기에 캠핑장과 리조트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상대적 안전 구역인 데다 하늘길이 막혀 관광 수요가 몰렸다. 방역당국은 많은 인파가 밀집하는 환경 자체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이태원에 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비난이 쏟아질까.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잠재된 위험은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확진 받은 당사자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게 옳을까.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처한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감염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누구나 의도치 않게 걸릴 수 있다'고 이해하지 못한 채 감염에 죄를 묻기만 하는가. 왜 병에 걸린 사람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부터 전하지 못하는가.
등교 개학이 진행 중인 학교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무증상 감염이나 전파 경로를 알 수 없는 확진자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확진자가 발생하면 해당 학교는 등교 수업이 중지되고, 관련 학원과 음식점도 폐쇄된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건강을 잃는 것만큼이나 사회적 낙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외국인 부모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한국과 다른 생활양식이나 문화는 무엇인지가 수군거림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혐오와 편견은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개개인의 특징을 가려가며 인간을 감염시키지 않는다. 그저 환기가 안 되고, 밀집도가 높으며, 구성원 간 상호교류가 활발한 곳에서 증식이 활발하다. 누구나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불필요한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지 않아야 한다. 방역뿐 아니라 교육 차원에서도 혐오라는 주제는 학생들과 진지하게 토론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규범은 양립 불가능할까
둘째는 법 집행과 사생활의 균형이다. 대한민국은 진단(Test)-추적(Trace)-치료(Treat)로 대표되는 K방역 시스템으로 코로나19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우수한 제조업, IT 인프라를 바탕으로 시행된 과학적인 방역조치는 감염병 확산을 막는 데 주효했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여준 높은 시민의식은 자긍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방역의 성공과는 별개로, 교실에서는 왜 훌륭해 보이는 대한민국 방역 시스템을 모든 나라가 채택하지 않는지 토론할 수 있다. 일부 나라는 방역물품 생산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의료진과 의료시설이 충분하지 않아서, 물류 및 IT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서 못할 수 있다. 의지는 있으나 여건이 안 되는 경우다. 그러나 물적, 인적 조건을 갖추고도 한국식 방역을 채택하지 않는 국가가 있다.
유럽 일부 국가는 개인정보보호와 사생활 침해를 우려해 감염자 동선 추적을 하지 않는다. 신용카드 결제 내역과 이동통신사 기지국 접속 내역까지 확인해 접촉자를 가려냈던 한국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들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며, 정부를 감시하고 의심하는 자세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사망자가 발생하더라도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인정보를 제한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우리는 확진자 정보를 알려주는 안전 안내 문자메시지에 익숙하다. 메시지는 확진자의 연령, 성별, 주거지를 알려준다. 더불어 이동경로와 이동수단, 진료한 의료기관까지 보여준다. 지금껏 우리는 개인의 자율권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 공공 방역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사생활은 중요하지만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는 여론이 대세를 이룬다.
올해 3월 일부 개정된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 감염병 의심자를 정의하는 항목을 유심히 보았다. 이 조항에 따르면 거의 모든 시민이 감염병 의심자로 분류될 수 있다. 개인 권리 면에서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생활을 제한한다고는 하지만 그 범위와 정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방역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절대 가치일까. 방역과 인권이 양립할 수 있는 정교한 방법은 없을까.
민주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직접 규칙을 만들고 실천하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정책이 보여준 법 집행과 사생활 보호의 장단점은 좋은 논쟁거리다. 학교에는 휴대전화, 화장, 복장 등 사생활 관련 규칙이 여럿 있다. 학생 모두가 방역의 혜택과 불편함을 겪어 봤으므로 수준 높은 학생 참여를 기대해봄 직하다.
인류 역사의 전환점에는 언제나 전염병이 끼어 있었다. 장티푸스는 아테네 제국의 황금기를 끝냈고, 페스트는 중세 유럽 인구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이번 코로나19를 정복하더라도, 때마다 새로운 전염병이 등장해 인류를 지속적으로 괴롭힐 것이다.
재난은 피할 수 없지만, 해석은 사람의 몫이다. 올해 학교는 사상 초유의 온라인 수업까지 감행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교과서에 수록하여 다루듯, 코로나19도 인류사의 주요 사건으로서 여러 각도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를 주제로 수업하게 되면 학생의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떤 가치를 지켜내고,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할까. 내가 보지 못한, 어린 시민의 시선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