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하이킥] Ep2. 기본은 시작이자 끝
“오늘 시합은 2분 3라운드. 1분 휴식입니다. 무에타이 룰을 기본으로 하지만,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무릎 연타는 2번까지만 가능하고, 팔꿈치 사용은 안 됩니다. 뺨 클런치 시 경기가 루즈해지면 심판 재량으로 중지시키고 경기를 재개할 수도 있습니다. 자, 양쪽 코너로!”
헤드 기어를 쓰면 마치 A 필러가 두꺼운 차를 탄 것처럼 시야가 좁아진다. 헤드 기어가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사각에 대한 두려움도 키우는 것이다. 심판의 룰 설명과 내 심장 소리가 서로 경쟁하듯 귓등을 때린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진짜 시작인가 보다.
“자, 스텝~, 스텝~, 스텝~, 스텝~”
무에타이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었다. 꽤 많은 나날들이지만 하루 수련의 시작은 똑같다. 스트레칭을 한 뒤, 줄넘기를 한다. 그리고는 바로 관장님의 목소리와 함께 기본기 연습을 시작한다. 수련 몇 년 차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시작은 스텝과 기본이다.
“발바닥 땅에 붙이지 말고! 발 뒤꿈치 들고! 걷듯이 가볍게~ 멈추지 말고~”
처음 스텝을 연습하던 날이 생각난다. 마치 무중력 우주선을 걷는 듯한, 눈에 보이지 않는 스테퍼를 타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 어색하고 힘든 동작을 하루 종일 해야 했다. 더 기가 막힌 건 스텝은 말 그대로 기본의 바탕이라 이걸 유지한 채 다른 고난도 기술을 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 힘들어……”
뻣뻣해진 종아리와 쥐가 날 듯한 앞발을 손으로 주무르는 날의 연속이었다. 스텝 연습을 하다 보면 미트 연습과 본 연습을 하기도 전에 지치기 십상이었다.
“쁘아까오 보면 그냥 걸어 다니던데, 왜 스텝을 이렇게 밟아야 하지?”
가끔 찾아보는 무에타이의 전설 쁘아까오의 영상을 생각하면 괜히 가습이 답답해졌다.
기본 연습은 스텝뿐만이 아니었다. 원투, 양발 원투 미들, 원투 무릎 등 뻔해 보이는 동작을 계속 반복했다. ‘실전에서 이걸 맞아줄 멍청한 상대가 있으려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더구나 체력 훈련도 매일 있었다. 가장 싫은 것은 인터벌(일명 빽빽이)과 제자리 달리기. 넓은 체육관 양쪽에 콘을 놓고, 전력 질주로 오가는 인터벌과, 제자리에서 30초 전력 질주 + 10초 휴식을 10세트 하는 제자리 달리기는 정말 지옥이었다. 여럿이 같이 하기에 처질 수도 없었고, 끝나고 나면 헛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군대야, 체육관이야 이게……”
반복 재생하고 싶은 본 훈련과 건너뛰기 하고 싶은 기본 훈련이 범벅인 된 날들이 쌓여갔다.
그렇게 얼마가 더 지났을까? 더운 여름이 되었다.
“대영씨, 스파링 대회 한 번 나갈까요?”
“네? 대회요?”
“전적 쌓이는 시합 말고, 다른 체육관이랑 하는 공개 스파링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요.”
“아, 네.”
“이제 그 정도는 한 번 나가봐도 될 것 같아요. 준비가 어느 정도 됐거든요.”
준비? 내가?
“다음 주에 연습 삼아서 우리 체육관에서 스파링 한 번 가볍게 먼저 하죠.”
“아, 네……”
그렇게 연습 무대에 올랐다. 링이 주는 긴장감은 언제나 대단했다. 사실 확신이 없었다. 콤비네이션도,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내가 링에 오른다고? 몇 달 전 재미 삼아 스파링을 하다 허우적 댔던 일이 떠올랐다. 영상을 보며 얼마나 부끄럽던지. 의구심과 호기심을 안은 채 새롭게 링에 올랐다.
결과는 놀라웠다. 뭘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이던 지난번과 달리 기본 펀치를 뻗고 있었고, 방향을 틀 때마다 휘청거렸던 스텝은 제법 안정화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스텝을 밟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어라? 이게 무슨 일 이래?’
여전히 상대의 화려한 공격을 만나면 움츠려 들었다. 이다음에 무슨 공격을 해야 통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2라운드가 끝나갈 때쯤에도 스텝을 밟을 체력이 남아 있었다. 쉬는 시간에 구역질이 나서 물을 못 마시던 지난번 스파링 연습을 생각하면 괄목상대할 일이었다.
스파링이 끝나고 관장님과 영상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땠어요?”
“어려워요. 그런데 확실히 재미있네요.”
“잘했어요. 저마다 스타일이 있는데 대영씨는 스텝을 좀 더 살려서 킥복싱처럼 화려하게 가야 하는 스타일 같아요. 그쪽으로 연습해보죠.”
“네, 그런데 관장님.”
“네?”
“전 시합을 염두에 두고 연습한 게 없는데 준비가 되었다고 어떻게 판단하신 거예요?”
내 질문에 관장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스텝이랑 기본기 연습하는 거 보면 알아요.”
“그건 누구나, 매일 하는 거잖아요? 그걸 보고 어떻게 알아요?”
“자, 저기 봐요.”
관장님은 한쪽 구석의 샌드백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수련한 분이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방금 저분이 뭐 쳤죠?”
“원투요.”
“그쵸? 그런데 같은 원투라도 소리가 달라요. 힘을 세게 쳐서가 아니라 중심이 선 채로 제대로 임팩트가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똑같이 원투만 치고, 스텝 밟는 거 같아도 하다 보면 중심축이 서는 모습, 펀치가 맞는 소리, 공격하고 나서의 호흡 등이 매일매일 달라요. 대영씨는 그게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 거고요.”
“우와……”
[잘못된 펀치(원투)]
[올바른 펀치(원투)]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선수들이라고 화려한 기술만 잔뜩 쓸 거 같죠? 아니에요. 결국은 원투펀치, 킥 등 기본기로 승부를 봐요. 그런데 그거 맞고 KO가 나온다니까요? 그리고 체력이 있어야 이것들이 가능한 거고요.”
뭔가 뻔하지만 잊고 있었던 진리를 접한 기분이었다. 그렇다. 결국은 기본기가 가장 중요한데 말이다.
교생 실습 지도를 5년째 하고 있다. 칭찬인지 욕인지 꼼꼼하게 피드백을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피드백 중에 가장 많은 내용은 뭘까? 자료의 적절성? 교수학습모형의 정확한 구현? 2015 교육과정 총론의 반영? 활동의 효과성?
정답은 기본기다. 어떤 화려한 도구나 자료를 사용하더라도, 결국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교구는 교사 자신이다. 수업 시간 동안 학생들이 가장 많이 바라보고 교감하는 것이 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교사의 표정, 몸짓, 목소리, 말투,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배움과 연결된다.
“학생을 지목할 때 손가락으로 하면 상대에게 적대적인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손을 모두 펴고 거꾸로 뒤집어서 지목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설명할 때 짝다리를 짚고 양손을 허리춤에 잡고 계시네요.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서 있기에 나오는 무의식적인 방어 자세인 것 같아요. 그런데 방어적이라는 느낌은 학생도 받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발을 붙이고 중심축을 세운 뒤에 손은 필요한 제스처만 취하도록 해주세요.”
“발문을 한 뒤에는 손을 드는 학생이 있더라도 3~4초 정도 기다려주세요. 손 든 학생에게 바로 발표 기회를 주면 다른 학생들이 생각할 시간이 부족할 수 있거든요.”
“말 속도가 빨라요. 평소 말하는 속도의 0.8배속 정도로(약간 느린가 싶을 정도로) 하시는 게 전달이 가장 잘 됩니다. 그리고 문장 구성을 생각해서 중요한 단어를 천천히, 강조해서 발음하시고, 끝맺음 서술어를 꼭 마지막까지 균일하게 소리 내어 주세요.”
사실 교수학습기술 영역 중 화려하지 않은 부분이기에 교생들도 나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회 시간에 협동학습 모형 중 하나인 ‘텔레폰 구조’를 화려하게 구현하고 싶어 했던 교생은 ‘되게 디테일하시네요. 그런데 텔레폰 구조 활동은 어땠나요?’라고 나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본기 피드백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교대 3학년 교생은 8번, 4학년은 12번의 수업을 하는데, 매 시간 기본기 피드백이 점차 줄어들다 오히려 긍정적 피드백으로 바뀌는 교생이 있고, 같은 피드백을 하다 하다 내가 지쳐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전자는 막판으로 갈수록 제곱의 값으로 성장하고, 후자는 단자리 상수값 이하로 성장한다.
사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구나 중요하다고 ‘배운다’. 그럼에도 중요한 기본기를 착실히 쌓는 사람이 있고,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다.
차이가 뭘까?
나는 동기와 끈기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든 기본기는 지루하다. 똑같은 루틴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질리지 않고 계속하려면 탁월한 끈기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 지루함을 견디고 싶게 만드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끈기는 수양과 노력의 영역이지만, 동기는 교육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에타이를 하며 기본기에 대한 동기를 찾은 것은, 이 기본기가 실전에서 어떤 영향을 발휘하는지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교실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목소리, 나의 기본기가 수업의 질을 어떻게 높이는지 느끼고,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다면 훨씬 더 즐겁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건 교사 스스로는 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므로 촬영 도구나 주변의 도움을 받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