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학, 학당교]#6 억압 Vs 단호함
교실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나는 교실 속 민주주의를 꿈꾼다.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과제다. 학생과 교사가 교실 안에서 인간답게 행복해야 한다. 함께 정한 살이의 규칙과 기본적인 마음이 갖추어지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취약점이 있다. 법치주의를 악용하여 사법 체계를 농락하거나, 민주주의 탈을 쓰고는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경우를 본다. 또한 투표를 통해 시민들은 엉뚱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교실도 그렇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되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잦은 실패와 성공의 연습을 통해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교실 그 자체라고 본다.
공권력이라는 낱말이 있다. 이는 국가와 민주주의 체계를 수호하기 위해 시민들의 합의하에 만든 '힘'이다. 이 힘을 통해 특정 개인과 집단이 다른 이를 억압하거나 폭력적이지 않도록 견제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학교에도 공권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왜 특정 시간까지 학생들은 교문을 통과해야 하며, 수업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아야 하는가? 모든 수업시간이 끝나고 담임교사의 '윤허'가 없으면 귀가하지 못하는가? 학교와 교실에서 학생들이 배울 권리와 안전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합의하며 교사에게 쥐어준 권력이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그럼 그동안의 경험과 많은 사례를 비추어, 교사들은 그 공권력을 정말 학생과 배움을 위해 사용해 왔는가? 자신의 감정을 풀기 위해 악용하지는 않았던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 많은 교사들이 지난날을 반성하며 교실 속 민주주의, 인권 등을 떠올리며 교사의 진짜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학생중심의 교육, 친절하면서 단호한 교사, 교실 속 교사의 권력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최근 매우 중요한 교육 이슈가 되었다. 또, 이를 통해 학교문화를 바꾸려는 노력도 차츰 번지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절대권력'을 누렸던 우리들, 갑자기 친절하면서 단호하게 바뀌는 것이 쉽지 않다. 자칫 방임으로 이어져 학급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고, 무늬만 민주주의인 '한국형 독재 민주주의'체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우선 이건 인정하자. 아무리 내려놓으려고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최소한의 공권력이 교사에게 있다. 이것만큼은 교사가 지켜야 한다. 교실에서 도의적으로 법적으로 '책임'을 지는 어른은 교사 단 한 명일 뿐이니까.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권리" "안전할 권리"
이것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공권력'을 제대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권력 견제의 기본은 '투명성'이다.
많은 학급에서 학생들과 함께 규칙을 만든다. 이때 많이 간과하는 것이 교사의 권력이다. 교사가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밝히지 않고, 사안에 따라 권력을 사용한다. 남용과 오용이 되고, 절대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최초 학급 규칙에 교사의 개입과 권력이 어디까지 사용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은 학생들과의 토의를 통해 정하지만, 수업 시간 내 학습 태도, 학교폭력, 안전사고 위험시, 함께 정한 규칙 준수의 보루로써 교사 통제에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교사에게 반드시 알려야 해야 할 사안(신고)과 스스로 자유롭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사는 자신이 내뱉고 지시하는 말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교실에서 가장 큰 권력을 사진 교사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은 교사 자신밖에 없음을 늘 생각해야 한다.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 '감정'은 배제되어야 한다.
현실 사회에서 정치권력에 합리적이지 않은 '감정' 들어갔다고 할 때 '정치보복' '정치외압' '권력남용'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교실이라고 다를까? 학생들이 교사의 정당한 지시나 통제에도 불만을 가지거나 억압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 권력에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차별을 받는다고 느낄 때 더욱 그러하다.
"아침활동을 준비해주세요"와 "다른 애들 봐라, 뭐 하고 있니?"는 같은 행동을 요구하지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자가 교사의 정당한 지시에 따른 행동 수정만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비교를 통해 감정을 자극한다. '선생님은 나만 미워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좋다. 교사가 이런 방식으로 말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들을 것이고 따를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점차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풀고 싶을 때에도 학생들은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받아낼 것이다. 당연히 학생들은 교사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정의롭다'거나 '합리적'이다고 받아들여질 때, 그들끼리의 문화 또한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피드백이 없으면 자기 합리화가 시작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늘 스스로를 견제해야 하지만, 스스로가 얼마나 강하고 큰지 가늠할 수 없기에 마주하는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기적으로 교사의 행동과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부당하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확인하고 새겨야 한다. 필자가 학생 설문을 통해 가장 많이 받았던 조언은 '목소리가 너무 크다'였다.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은 감정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분명, 낱말과 문장은 그렇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크기를 통해 학생들은 교사의 감정을 느끼고 억압을 느꼈다는 뜻이다. 이런 피드백을 학생들과 나누고 사과할 부분이 있으면 사과한다. 이런 과정이 교사가 가진 권력을 견제하는 힘이 된다.
권력이 누군가에게 '사이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끔씩 설문에 "혼나야 할 애들이 있는데 혼내지 않으신다." "그런 아이들을 무섭게 혼내주세요."라는 답변을 하는 학생이 있다. 학생들이 그동안 교사의 막강한 권력과 억압에 길들여진 것이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뭔가 잘못한 학생이 교사에게 된통 당하는 '사이다'같은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떤가? 뉴스의 댓글을 보라.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릴 것 없이 도를 넘 폭력적인 댓글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우리의 교실은 이것을 견제해야 한다. 누군가가 권력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그것이 '정의'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