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 5. 교실 속 문제 상황 프레임 다루기(3)
교실 속 프레임(관점) 다루기 세번째 이야기
길고 긴 프레임이야기를 세번째 이야기를 통해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주제의 핵심은 '늘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보다 나의 생각을 넓히고 학생을 이해하는 수단, 그리고 나의 교실이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레임 #8 게임, '금지'보다 '지혜'를 알면 대화가 된다.
모바일 게임 콘텐츠는 스마트폰 기기의 학생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그 성장속도 빨라졌다. Google Play 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국내 모바일 시장 규모는 5,912억원에서 2015년 8,578억으 로 45%성장했다. 그만큼 게임 콘텐츠의 수도 늘어나고 게임을 즐기는 유저의 수도 늘어났다는 뜻이다. 모바일 게임은 기기 휴대의 편의성과 캐쥬얼성으로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놀이 도구이다. 그리고 과몰입으로 학교와 가정에 마찰을 빚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많은 부모님이 학생들의 성별과 상관없이 스마트폰의 게임, SNS, 유튜브 콘텐츠 사용에 많은 걱정을 하고 계신다. 어떻게 하면 '안 할 수 있을까?'라고 상담을 요청하신다. 그러나 필자의 대답은 '안 할 수'가 없으므로 '잘 할 수'있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물론, 원론적인 대답은 있다. 사용시간을 정하고, 특정 키퍼어플을 설치하고, 가정에서는 스마트폰 안쓰기에 동참하는 등의 방법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과몰입하는 콘텐츠테 대한 대안은 아니다. 최근 게임 콘텐츠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임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강화(승급, 각성, 진화 시스템), 경기장(배틀, 경쟁, 대결), 과금(캐쉬, 현질이라고 불리며 과금을 하지 않은 유저는 절대로 현질 유저를 이길 수 없으며 심지어 특정 콘텐츠는 과금없이 즐길 수 없음)의 시스템이다.
게임 제작자 입장에서는 게임을 무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당연히 과금 시스템을 통해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과금을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과금 유저를 따라잡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거나 세뱃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몰입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럼 어떻게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과금 경쟁 게임 콘텐츠의 경우, 과금시스템이 장기화 되면서 과금과 무과금 유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무과금 유저가 게임을 그만 두게 된다. 결국 과금유저가 남게 되니 별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과금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남들보다 빨리, 더 많이 강해지고 싶기 때문인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 더 이상 없다면 굳이 과금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자 입장에서는 적당히 약한 무과금 유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무과금 유저가 떠나지 않도록, 그리고 신규 유저가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는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이벤트'이다.
신규유저 보상, 접속 보상, 장기미접속(보통 7일)보상 등의 이벤트를 통해 무과금 유저가 계속 게임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부분의 '강화, 경기장, 과금' 요소 게임이 이런식이다.
필자가 특정 게임에 과몰입하는 학생을 상담하면서 게임을 같이 해보기로 하였다.
필자는 접속 보상, 장기미접속 보상 등의 이벤트에만 참여하였다. 그런데 매일 3시간 이상씩
게임하는 학생이 필자의 게임화면을 보고는 매우 허탈해하였다.
화면상의 캐릭터는 모두 이벤트로 받은 것이며 게임 플레이는 거의 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이벤트활용와 게임 플레이 시간을 적절히 조화하는 방법은 학생과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방법으로 적절하다. 위의 예시는 특정게임에 대한 예시일 뿐이며 게임 콘텐츠는 다양하기 때문에 저 한가지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그 학생이 과몰입하는 게임에 대해 같이 해보고 알아보면서 학생이 일정시간 이상 그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콘텐츠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알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마!'에서 '잘 해보자'로 바꾸는 지혜에는 해당 콘텐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해가 되면 지혜가 생기고, 대화가 된다. 그리고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프레임 #9 널 이해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너의 의견은 존중할게.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학급에서 어떤 다툼이나 문제가 생길 때 교사가 입밖으로 자주 꺼내는 말이 아닐까 싶다.
"만일 저 친구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넌 어떨것 같니?"
"기분 나쁠 것 같아요."
"그렇지?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행동하니? 어서 사과해!"
그렇게 사과하는 학생의 표정을 살펴보자. 정말 '역지사지'했는가?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도 역지사지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역지사지가 안되는 어른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을 생각하고 느끼기에 학생들의 환경이나 경험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역지사지라는 말이 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 처한 환경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상대방이 나와 환경, 주장, 생각, 감정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생각을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주장이나 생각, 처한 환경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이해할 수가 없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아래 드레스 사진을 보자. 당신에게는 이 드레스에서 두가지 색을 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은 색을 본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내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색을 말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몇 년전 색깔 논쟁이 있었던 드레스,
흰색과 황금색의 조합인가? 파랑과 검정의 조합인가?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이는가? 이유가 궁금하다면 링크를 참조하자
http://scienceon.hani.co.kr/?document_srl=248569
드레스의 색깔이 어떤가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 신체적 특이점 때문이라면, 정치적인 관점은 어떤가? 또한 종교적 관점은?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많은 가치들이 서로 이해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와야지 생각하는 기사의 댓글들을 보자. "나와는 정말 생각이 다르구나"가 많은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댓글을 달수가 있지?"하는 것이 더 많은가?
이제는 다른 이의 이야기와 생각, 주장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치적, 종교적, 개인적 신념이 다양화되었다. 이것은 학급도 마찬가지이다. 교사의 생각과 가치, 신념은 벗어나지만 딱히,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대답과 반응을 만나게 된다. 학생들에게 미래사회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경우, 다툼과 싸움은 상대방의 행동과 주장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너와 내가 관점과 생각,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 후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서로의 입장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타협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삶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가 이해해라.", "너라면 이해할 수 있겠니?", "입장을 바꿔봐라." 보다 "넌 상대방의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니?" "너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니?(혹은 없는 부분은?)" 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두 개의 입장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원하는 역지사지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결코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다른 입장의 색들이 함께 있을 때 보이게 된다.
프레임 #10 가끔은 의미없는 일이 세상을 바꾼다.
학급에서 학생들은 '의미없는' 행동을 많이 한다. 종이를 잘게 찢는 다거나, 자를 딱딱 거리기, 앞 친구를 툭툭 건드리거나 연습장에 낙서를 한다거나 말이다. 여기서 의미의 기준은 오로지 한명의 판단이다. 분명 학생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학급에서 교사는 '의미'를 정말 많이 찾는다. 내가 하는 행동과 활동이 모두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연하다. 우리가 해야되는 일이 그것이니까. 그런데 가끔은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학생들과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즐기고, 웃고,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것이 교육적인가는 뒤로 미루어 두고 말이다.
상상을 해본다. 원시시대 누군가 계속 나무와 나무를 서로 미친듯이 비비고 있다. 지나가던 한 인간은 그를 비웃을 것이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그의 행동에 누가 관심을 가졌을까? 이내, 열과 연기가 나며 불이 붙는다. 누군가의 의미없는 행동이 세상에 기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수업이 누군가의 의미없는 질문과 장난, 행동으로 방해받는 것이 무척 싫을 때가 있다. 그 때 화를 내려다 나를 한번 멈추고는 '불을 발견하는 의미없는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세상을 바꿀 어떤 사람의 행동을 막는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필자는
"프레임 #1 "수업은 언제나 '성공적'이어야 한다?", 완성품이 아닌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에서 실패가 예상되는 수업을 해보자고 제안했었다. 수업에서 학생들이 무엇인가 얻고 교육적인 결말을 얻어야 되는 성공적인 교과서 수업에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을 멈추자는 것이다.
가끔은 의미를 생각하기 보다 '내가 좋아서', '한번쯤 해보고 싶어서', '그냥' 교실을 놀이터와 낙서판 삼아 놀아보자. 어쩌면, 학생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생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까?
교사영상제작단 뻘짓, 타이틀 부터 의미를 찾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의미없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떤가?
(https://www.facebook.com/teachersmovie/)
다음화는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 6. 교사는 기록이 밥먹여 준다.'로 만나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