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그림책] #3 싱그러운 여름이 기다려지는 그림책
여름, 좋아하시나요?
저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여름이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 대구에서는 이미 4월 중순이면 기온이 33도까지 올라가곤 했거든요. 트렌치 코트를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출근을 해 보지만, 체온이 높은 저는 이미 직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김치가 되곤 했었지요. 여름, 축축하고 땀나고 숨이 훅 막혀오는,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계절이었죠.
대구에 비하면 비교적 덜 더운 서울로 직장을 옮기면서 여름이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어요.
낙산성곽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으면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볼 때,
망원동 한강공원에 가서 다리에 차가 오가는 걸 보며 바람을 맞을 때,
마로니에 공원에서 버스킹하는 뮤지션을 보며 맥주 한 캔 홀짝였을 때,
여름밤이 이토록 좋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어요.
하루가 달리 기온이 높아져 이젠 봄이 없다는 얘기를 모두가 하지만, 한 번 좋아진 여름이 다시 싫어질 것 같진 않아요.
여름밤의 정취는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싱그러운 여름이 기다려지는 그림책 두 권을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첫 번째 작품은 <나의 여름> (신혜원 글, 그림)은 표지와 제목만으로 제 가슴을 초록으로 물들였지요.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표지. 우리가 온통 한 톤의 색깔들로 종이를 마음껏 칠해 본 건 언제였을까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모니터 속에서 하얀 종이에 검정 글자로 타이핑만 치며 지내왔던 것 같아서요.
절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초록색 강아지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가슴이 상쾌해지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그냥 '여름' 도 아니고 '나의' 여름이잖아요.
어떤 그림들이 숨어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어지는군요.
신혜원 작가는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모님의 텃밭에는 여름이 가득합니다.
바람, 풀, 그늘 곳곳에 숨어 있는 여름은
제게 작고 크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여름의 짙은 초록과 시원한 그늘을 담는 마음으로
이 책을 그렸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리 머릿속에 몽게몽게 피어나는 각자의 여름이 있을 겁니다.
당신의, 어떤 여름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있나요?
들풀 바람이 불자
백로가 말했어.
여름인가?
그림책의 매력은 역시, 이런 곳에 있지요.
들풀과 바람과 백로. 평소에 결코 떠올리지 않을 것 같은 동물과 식물과 자연현상이 신선하게 만납니다.
과감한 스카이 블루 컬러와 매치되니 더더욱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 들지요.
거미줄을 피한
방아깨비가 물었어.
혹시 여름이야?
모든 생명이 경쟁이라도 하듯 약동하는 여름.
싱그럽기만 하기엔 다들 치열하지요. 거미도 먹고 살아야 하지만, 방아깨비도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거나 움츠리기만 하는 생명은, 여름엔 결코 없습니다.
막 꽃망울을 터트린
도라지꽃이 답했어.
뿅 뿅 피어나는
여름이야.
도라지꽃이 보랏빛인 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더구나 지금 도시에서만 자라는 아이들은 한 번도 도라지꽃을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도라지꽃은 풍선처럼 볼록 맺힌다지요. 그래서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도라지꽃은 뿅, 뿅 터뜨리는 놀이를 했다고도 해요.
도라지꽃이 볼록해지면, 여름이래요.
당신은 언제 여름이 성큼 왔다는 걸 알았나요?
그 대답을 제 귓가에만 살짝 속삭여 줄 수 있나요?
두 번째로 함께 읽고 싶은 그림책은 <나의 동네> (이미나 글, 그림)입니다.
앞서 소개한 그림책처럼 한국 작가가 글, 그림을 모두 선보인 창작 그림책이지요.
액자 속으로, 혹은 창 밖으로 살짝 여름 풍경을 엿보는 듯한 느낌.
그 신비로운 느낌에 책 표지를 보자마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죠.
사람들이 "넌 그게 왜 좋아?" 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힐 때가 있어요.
무엇이 왜 좋은지 설명할 논리가 갖춰줘야 무엇이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미 마음을 빼앗긴 뒤에 내가 그걸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찾곤 합니다.
그쯤 되면 이유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내 마음 속 어떤 부분과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졌겠지요.
아날로그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다가 '치직' 소리가 잦아들면서 방송이 뚜렷하게 들릴 때의 그 느낌.
바로 그거죠.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찾았을 때의 쾌감이라는 건.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까지 2층짜리 양옥집에 살았습니다.
그 동네의 모든 집은 똑같이 닮아 있었고요. 부끄러움이 많았던 저는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지요.
엄마가 "너도 가서 같이 해 봐." 하고 등을 살짝 밀어도 결코 함께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친구들하고 가끔씩은 동네 탐험을 한다며 동네가 어둑해질까지 뛰어다니곤 했어요.
운동신경이 굼뜬 제가 늦게 달려도 아이들은 저를 기다려 주었지요. 그 친구들은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안녕, 정말 오랜만이야."
파란 모자에 조끼를 입고, 빨간 가방을 둘레맨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빕니다.
집배원일까요?
신규 교사로 발령을 받고 나서 한 번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 본 적이 있었어요. 깜짝 놀랐지요.
'내가 누볐던 골목이 이렇게 좁았단 말이야?'
마당이 무척 넓어 보였던 친구네 집 마당도 아주 자그마했지요.
이젠 누가 살고 있나 싶어 철제 대문 사이로 집을 들여다보다 개가 캉캉 짖어서 깜짝 놀라 뒷걸음쳤었어요. 그것도 벌써 10년이 흘렀네요.
"문득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우리 동네는 그대로일까?"
파란 모자를 쓰고 빨간 가방을 맨 저 사람은 자꾸, 자꾸 동네 안으로 페달을 밟고 달려갑니다.
나무는 푸릇푸릇하고, 보랏빛 나비가 팔락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파란 조끼 안으로 땀이 흥건하게 젖지는 않았을까요?
"여름 해가 길어 오후 내내
담장 밑에 앉아 수다를 떨던 기억,
어느 집에서 제일 먼저 꽃이 피고,
파랑새는 어디서 알을 낳는지....."
옛 동네를 찾아왔다고 하는데, 마치 처음 보는 낯선 곳에 여행을 온 것만 같죠.
맞아요. 내가 예전에 알던 그 곳은 그때 내가 알던 그 곳이 아닐지도 모르죠.
예전에 내가 알던 그 사람이 그때의 내가 아니듯이요.
예전의 내가 더 이상 같은 내가 아닌 건 물론이고요.
이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기며 내 시선이 그저 스치고 말았을 풍경들에 한 번씩 눈길이 머묾을 느낍니다.
우리는 얼마나 무심하게 많은 것들을 흘려보내고 있나요?
기다렸다는 듯이 피는 하얀 치자꽃과
너무 흔해서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장미덩굴은요?
어디나 자라있는 가로수여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느티나무들은 어떻고요?
당연히 다가오는 여름이지만, 어느새 긴 팔 옷을 챙겨입어야 하는 가을이 성큼 와 있을지도 모르지요.
나보다 먼저 다채로운 빛을 발견해 준 작가들의 시선이 고맙습니다.
책장에서 풀 향기가 나고, 산들바람이 불어온다고 느꼈다면 그건 저의 착각이었겠지요.
아니,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여름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