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그림책] #2 직장생활이 고달픈 당신에게 주고픈 그림책
작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 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2003년에 출간되었지만 아직도 직장생활의 애환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인용되는 책입니다.
밥벌이가 뭐 언제 덜 고단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요?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요.
"난 내 일이 맘에 들어. 꽤 만족해." 라고 말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죠.
저도 제 직업이 맘에 든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기습적으로 묻는 질문에는 헛점을 찔리고 말았죠.
"당장 누가 조건 없이 100억을 준다고 하면? 그래도 정년까지 일할거야?"
동공이 흔들리고 잔머리가 이리저리 굴러갑니다. 내가 한 달에 쓰는 돈은 얼마고, 출퇴근에 쓰는 시간은 얼마 정도며, 하루에 몇 시간을 근무하니...
'그래도 변함없이 일 할거야.' 라는 말은 끝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이 직업에 만족하는데도, 어째서 그럴까요?
밥벌이는 고단한 일이니까요.
혼자면, 혼자여서 버티기 힘들고, 여럿이면 여럿이서 부대껴서 힘드니까요.
그 고단함을 느껴본 당신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그림책 두 권을 가지고 왔습니다.
함께, 읽을까요?
첫 번째 그림책은 <마음 조심>(윤지 글, 그림)입니다.
우리 마음 속 어딘가 한 부분과 닮아 있는 듯한 주인공, 소라게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죠.
그림책 표지 뿐만 아니라 뒷표지까지 쫙 펼쳐 보시면 색다른 느낌을 느끼실 수 있죠.
윤지 작가는 존 버닝햄이나 앤서리 브라운 같은 클래식한 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색 사용을 합니다.
형광 오렌지색과 형광 노랑!
아주 납작한 2D 느낌이 나지만 눈이 가는 일러스트 같죠.
우리처럼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모습,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네요.
소라게의 하루를 살펴볼까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알람시계에 맞춰 일어납니다.
졸려서 축 처지는 몸을 애써 일으켜 세워, 단장을 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안녕, 나는 소라게야.
보통 사람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잘 놀라서
사람들은 내게 소심하다고들 해."
구석에 쬐그맣게 보이는 우리의 소라게.
사람들의 발에 차이지는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팽이, 두더지와 거북도 보입니다. 느릿느릿하고 더듬더듬하는 친구들이에요.
북적이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면서도 되려
"실례합니다. 지나갈게요." 를 연신 반복하는 소라게.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지는 않으신가요?
"내가 늘 하는 말이야.
너무 자주 하나 싶지만
난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기 싫으니까."
"깜짝이야!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지 뭐야.
큰 소리만 나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직장 상사가 호통을 치자 자기에게 말하는 건 줄 알고 벌벌 떠는 소라게.
이쯤 되면 작가가 제 모습을 보고 작품을 만든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군요.
"그런 식으로 하면 사회생활 힘듭니다!
자꾸 집으로 들어가면 어떡해요!"
결국 조심하던 소라게도 소극적인 태도에 질책을 당합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게 죄인가요?
억울한 마음이 같이 들면서도 놀라서 등딱지로 들어가버리는 소라게가 너무 귀엽기도 합니다.
이 그림책의 백미는 소심한 소라게의 친구들이 다 모인 저녁 자리입니다.
소라게와 조개, 게와 거북이는 나름의 직장생활의 애환을 털어놓습니다.
게는 자기가 예전과 달리 강해졌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글쎄요. (웃음)
이 그림책의 백미는 바로 이 친구들의 식사 장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귀엽습니다.
마치 동물판 '미생' 같다고나 할까요?
억울하고 힘겨운 직장생활이지만 마음을 펼쳐 보일 곳은 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목은 왜 '마음 조심' 이냐고요? 그건 끝까지 보면 알 수 있지요 :)
직장생활을 하는 또 다른 주인공을 살펴볼까요?
이번에도, 역시 동물입니다.
<빨간 나무>로 우리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작가 숀 탠의 <매미>입니다.
숀 탠은 상징이 가득한 그림을 선호합니다.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득한 그림과 글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나 봅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죠.
'매미' 사원증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텍스트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조여온다고요?
네, 그림책은 색으로, 침묵으로, 연출로 말을 하지요.
여러분이 읽으신 그 분위기가 맞을 겁니다.
"매미는 고층 빌딩에서 일한다.
데이터를 입력한다.
십칠 년 동안 아파서 쉬는 날은 없다.
실수도 안 한다.
톡 톡 톡!"
회색의 파티션 사이에서 일을 하는 매미.
넥타이를 하고 회색 양복을 입고, 회색 컴퓨터 앞에서 끝없이 일을 합니다.
책상 파티션과 파티션 사이.
이 큰 도시에서 딱 그 만큼 내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답답해지죠.
게다가 내 발로 걸어들어간 직장이니, 미칠 노릇이죠.
"십칠 년 동안 승진도 없다.
인사부장은 말한다.
인사부에서는 인간 직원만 관리한다고.
매미는 인간이 아니라고.
톡 톡 톡!"
매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습니다.
뒷모습으로도 애잔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인간 동료는 매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고
못된 짓도 많이 한다.
매미를 바보라고 생각한다.
톡 톡 톡!"
단 하루도 쉬지 않고 17년동안 일을 하고 늘 야근을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심한 대접을 받습니다.
머릿속에 많은 뉴스와 기사가 둥둥, 떠오릅니다.
"매미는 집을 빌릴 형편이 못 된다.
사무실 벽 틈에 산다.
회사에서는 모른 체한다.
톡 톡 톡!"
아, 생각나네요.
저는 여기저기서 매미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날마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윤을 내면서도 앉아서 쉴 공간이 없어 화장실에 숨어서 쉬었던 그 분들의 고단한 표정이 생생합니다.
우리들 그 분들을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매미는 어떻게 됐냐고요?
아니, 매미는 어떻게 했냐고요?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 그림을 보시면 이제 아실 법도 한데요.
매미니까요, 우리의 매미는 17년을 참아왔지만 더 이상은 참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섬뜩하게 매력적인 탈출은 직접 책을 넘기며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
<매미>의 작가 숀 탠의 가족은 호주에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몸이 부서도록 일했지만 한 번도 주류에 속할 수 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숀 탠의 모든 작품에는 서럽고 소외된 정서가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 생활의 애환을 겪어봐서,
속상한 마음에 한 잔 기울여봐서,
우는 동료를 위로해 준 적이 있어서,
그래서 더욱 가슴 절절히 이해되는 그림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어른이라서 그나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