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는 개인사업자(?)
3년 2개월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조그만 대기업의 건설 파트에서 경리 업무를 하면서 건설업이라는 쉽게 겪기 어려운 경험을 누렸더랬습니다. 그 때만해도, 교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던 시절이라 조직 생활에 충실하게 참여하고 조직 문화을 온전히 경험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즐겁거나 신났던 듯 싶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그러다가 교대 진학을 목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를 하면서 교대 진학을 준비하고, 교대에 진학해서 4년간의 학부 과정을 마친 후에, 교사가 된지도 벌써 만 6년이 지났습니다.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한 교사 생활을 해오면서, 교사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여타의 공동체 - 조직 - 와는 조금 결이 다른 부분을 경험하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도 두드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주관적인 경험에 대한 공감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글을 두드려볼까 싶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개인사업자
초등학교 교사가, 중고등학교 교사와 그리고 여타의 직업군과 구분되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교실'이 있다는 부분입니다.
3년 2개월 남짓 직장생활을 하면서, 항상 제 등 뒤에는 제 사수 노릇을 했던 팀의 과장님이, 그 뒤로는 저희 팀 내 파트장이었던 과장 - 으로 시작해서 세 해 만에 차장과 부장으로 승진하신 - 님이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그 분들은 제 업무 모니터를 항상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간혹 식사 후 제 사수셨던 과장님이 작게 트림을 하시면 그 냄새가 제 콧속을 자극했던 그런 기억도 생생합니다.
퇴사 후, 오랜 기간의 학업을 마치고 발령을 받아 경력증명서가 필요해진 후, 근 6여년 만에 다시 찾은 회사는, 그 때의 그 분들이 자리만 한 칸 씩 윗쪽으로 올라가신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옹기종기 떨어져 앉아서 근무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일반 직장은 그렇더군요. 한 팀에 속하면 같은 프로젝트, 같은 결을 가진 업무, 같은 종류의 일들을 그 지위에 따라 경중을 가려서 나누어 맡게 됩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각자의 업무 스타일이 존중되기 보다는 선임자의 스타일에 맞추어지고, 그 스타일에 따라 제 스타일을 바꾸어야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그에 관련된 대화들이 업무 중에, 업무 이후의 회식 시간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직장생활 중에 제가 들었던 가장 당황스럽던 말은, 저희 파트장이셨던 (당시에는) 차장님께 들었던 말씀이었습니다. 한 5년 정도만, 너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은 미루어두고, 회사를 위해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업무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떻겠느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저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입사 당시에 저는 굉장히 좋은 조건을 회사 내에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문 지상에도 소개되었던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그룹 공채로 입사했으며, 건설 파트로 발령받았을 때 당시 관리 쪽에서는 학력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윗분들은 자리만 있으면, 너는 대과만 없으면 무조건 별은 달거다, 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큰 사고만 안치면 부장 넘어 임원까지는 갈거라는 말씀이셨죠. 기대도 많았고, 관심도 컸습니다. 그래서 맨날 회사로 보드게임이나 사서 나르고, 근무 시간에 1층 매점에 가서 짜파게티나 사먹으면서 허기를 달래는, 그런 말단 사원이 때로는 기대에 못미치고 때로는 아쉽기도 하셔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이해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싫었던 것입니다. 직장이 인생을 걸 곳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마 그 즈음부터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듯 싶습니다.
교사 공동체와 굉장히 결이 다릅니다. 일반 직장은, 물론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조직의 목표가 개인의 지향보다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조직 문화는 개인의 성향을 앞섭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길기 때문에 개인은 천천히 조직에 맞추어져갑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함께 근무하고, 함께 논의하고, 함께 추진하고, 그런 과정에서 끊임없이 맞추어가야하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교사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사는 교실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교수-학습 과정을 수행해가는 주체이며, 교사의 교수는 항상 독립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교사의 학급 운영 또한 독립적입니다. 교사는 자신의 교육철학과 교육관에 따라 자신의 학급에 속한 우리 반 아이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격려하는 일을 독립적으로 수행합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우리 반에서 이루어지는 교수-학습 과정과 학급 운영 과정을 들여다 보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며, 혹여 들여다보더라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여 무언가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것이 교사의 교수-학습 과정 진행과 학급 운영 과정에 대한 본질적인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만큼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우리 반 아이들을 제외한 누구로부터도 독립적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하여 제가 두드렸던 어느 글에서, 교사의 학급 살이는 꼭 법관과 같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꺼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법관의 판결은 독립적입니다. 검사가 상명하복의 검사동일체를 추구한다면, 판사는 철저하게 판사 개인의 법 해석에 따라 판결하며 이것이 명확하게 존중됩니다. 이것을 우리 헌법에서는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교사의 학급 살이도 실은 이것 만큼이나 독립적입니다.
다행인 것은, 제가 현장에서 만난 많은 선생님들이, 그 철학이나 방향성은 상이할지라도, 자신이 맡은 학급에 대한 책무성은 모두 뛰어나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이 법관에게 요구되는 책무성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책무성이라는 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교사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 - 제일 대표적으로는 동학년 모임 - 이것의 성격은 여타 직장의 조직과는 결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모두 노력하는 공통의 목표를 가졌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개별적이며 독립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사 공동체에서는 교사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교수-학습에 대하여, 자신의 학급 운영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어놓지 않으면, 다른 교사는 그에 대해 말하지 못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교사는 꺼내어 놓습니다. 사실 교사가 모인 자리가 가장 재미없는 자리 중 하나입니다. 교사가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늘 우리 반 아이들 이야기, 우리 반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 이야기, 우리 반의 희노애락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기시감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 때 그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내내 듣는다고 해서 들은 것에 대한 평가나 요구를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할 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누는 이야기는 명료하거나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우리 학급 살이에 대한 이야기는 늘상 모여서 하지만, 또 듣지만, 하는 이야기나 듣는 이야기나 제각기 독립적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제가 겪었던 학교 밖의 직장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맡은 바 업무는 직책에 따라 다르지만, 서로의 업무에 대해서 항상 공유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업무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는 내내 오고갈 수 밖에 없습니다. 직급이 낮으면, 요구 받습니다. 그런데 다 그렇겠지만, 그런 요구의 본질은 주관적입니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효과적이니까 너도 해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내내 부닥치면 그 때는 피곤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맞추어가거나 그만두거나 하는 것이겠지요.
더 나아가서 업무에 대한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업무 외적인 갈등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제가 다니던 직장은, 그룹사 내의 건설 파트였기 때문에, 그룹사의 문화와 건설업 특유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 둘 무렵에는, 정말 1주일에 두 번씩은 회식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6시 반이 정확한 퇴근시간이지만, 1시간 정도씩은 할 일이 없어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팀장님의 주도 하에 1차와 2차를 꼭 거치고 집에 갔었습니다. 지하철 막차가 끊기기 전에 간신히 집에 도착해서 한 대여섯시간 못되게 눈만 붙이고 또 여섯 시쯤 일어나서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얹는. 그런 것이 싫다면, 방법은 둘 뿐입니다. 적응하거나, 그만두거나. 물론, 제가 그런 것 때문에 그만 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초등학교에서의 교사 공동체는, 얼마든지 이러한 업무적이며 업무 외적인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 그저 내 교실로 향하면 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교사가 함께 학급 살이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누지 않더라도, 그저 내 교실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대하고 행복함을 얻어가면, 그것으로 괜찮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인정하고, 학부모가 인정하면, 교사는 학교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동료 교사와의 관계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래서 교사는 교사 공동체 관계의 불편함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교사는 개인 사업자나 다름 없는 위치인 셈이죠. 개인 업장을 가지고 있는, 1인 사업체의 대표. 고객일 수도 있고, 협력자일 수도 있는 그런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피할 수 없으면 떠나라? 떠날 수 있으니 피하라!
위의 부분과 맞물려, 교사 공동체가 여타 직장의 조직과 구분되는 또 다른 특징은,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조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만두고 6년 만에 다시 찾았던 직장에서 가장 놀랐던 것이, 6년 전과 거의 동일한 구성원을 만났다는 것임을 위에서 두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지내야하기 때문에, 일반 직장 조직은 갈등이 발생할 경우 반드시 해결을 봅니다. 맞추거나, 떠나거나. 대부분은 떠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맞추려고 하는 편입니다. 저도 그랬구요.
퇴사 결정을 하고 파트장이시던 부장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던, 2006년 2월 2일 오후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옆 관리팀 직원이 외근다녀오는길에 사온 떡볶이 외 분식을 함께 나누어 먹은 후, 파트장께 말씀드릴게 있다면서 업체 상담실로 모시고 가서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파트장의 뜨악하던 표정과 함께 제 마음에 찾아온 홀가분함은 정말 무어라고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조직에 맞추어오고 익숙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불현듯 찾아온 자유로움의 감정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그러나 학교 공동체는 항상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게 참 독특함을 낳습니다. 함께 하지만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 독립적인 학급 살이를 운영하는 와중에, 간혹가다 발생하는 갈등 상황이 있다면 굳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지고 볶고 할 필요가 없이 피하고 버티면 되는 곳이 바로 학교인 셈입니다.
동학년에 잘 맞지 않는 선생님이 있으시다면, 굳이 가서 업무적으로, 혹은 업무 외적으로 갈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작업을 할 필요없이, 적당히 맞추고 피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올해 한 해만 동학년으로 지낸 후, 내년에는 다른 학년으로 헤어지면 되니까요. 웬만하면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을만큼, 주변에 학교는 많으니까요.
교장, 교감 선생님과 업무 스타일이나 교육관의 차이가 심대해서 갈등이 있다면, 길게는 2년만 견디면 됩니다. 교사는 2년 근무 후에 옮겨갈 수 있으니까요. 참고 피하면 됩니다.
교사 간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교사 간 공동체에서 나오는 의견이 잘 섞이지 않고 독립적이며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까닭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모든 학교가 이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겪은 학교들이 모두 아파트 주변의 학교라서 그런 학교들의 특성만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그저 맞춰주고 웃어보고 하하호호하면서, 내 생각을 바꾸거나 남의 생각이 바뀌게 하려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가면 헤어지면 그만일 뿐인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문제인가. 저는 그렇게는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지면이 길어지니 이쯤에서 일단 접고, 다음에 이어서 더 두드려볼까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