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8. 특별한 최선의 노력
직장 1년차는 참 즐거운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저희 회사의 자리는 모니터가 안쪽으로 비스듬하게 놓여있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안쪽에 자리한 제 사수가 제 모니터를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옆팀에 앉은 대리/과장님들도 제 모니터를 다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근무 시간에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보드게임에 한창 미쳐가던 때라 항상 보드게임 커뮤니티 사이트를 새로고침하고 있었고, 한참 환상소설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던터라 관련 사이트들도 한참 서칭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만큼의 일이 많이 없기도 했었습니다. 그룹 전체의 매출은 6조 정도 된다고 하였지만, 저희 PU의 매출은 약 3천억원. 그 규모 치고는 본사 인원이 좀 많은 편이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무로 인원을 편제한터라 인원을 줄이면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직무가 많아지기도 하거니와, 서로 다른 역할을 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을터라 아마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1년 차에는 그룹 공채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OJT 우수사원 장려상에 뽑혀 상금도 받고, 상장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뭐,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계열별로 안배하였을테고, 저와 같은 계열로 온 다른 동기들은 다 기술자들이어서 현장에서 너무나들 바빴기 때문에, 본사 요원인 저라도 부지런히 OJT 일지를 써야 했을 것입니다.
2년차, 3년차 갈수록 일은 조금씩 많아졌습니다. 회사에서도 1년차 때처럼 그냥 두진 않았습니다. 조금씩 일의 범위도 늘리고, 깊이도 늘려갔습니다. 그래도 그게 벅차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매출 규모가 크지 않은 탓에, 일의 범위도 아주 넓고 깊어질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8시까지 출근하면 - 그룹사 전체적으로 8시 30분 출근, 5시 30분 퇴근이었지만, 저희는 현장이 7시 50분에 시작하므로 본사도 8시까지는 출근하였습니다 - 1시간 반 정도는 업무 시작을 미루곤 하였습니다. 저는 주로 내부 인트라넷을 둘러본다든지, 관심 커뮤니티 사이트 - 환상소설, 보드게임 등 - 를 한 바퀴 돌아보곤 하였습니다. 제 윗 분들은 주식거래를 준비하거나 자동차/주택 등 자기 관심사를 둘러보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9시 넘어 하나둘씩 업무를 시작하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에 한 번씩은 꼭 담배 타임을 갖곤 했습니다. 저야 흡연을 하지 않으니 노랑 믹스 타 들고는 탕비실 옆 비상구 계단으로 나가면 항상 서너명의 직원이 담배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었습니다.
11시 반쯤 되면 슬슬 점심식사를 먹으러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던 업무를 저장하고, 포털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스탠바이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은 뭘 먹을까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11시 55분쯤 되면 저를 내 보냈습니다. 자리를 맡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식사하고 오면 또 1시 반까지는 쉬는 시간 비슷하게 널널한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너무 졸리고 피곤하면 화장실에 가거나 지하 문서고에 가곤 하였습니다. 화장실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앉아 뒤편 사기 물통으로 몸을 비틀어 머리를 누이면 15분 정도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주로 전날 늦게까지 회식을 하면 그 다음 날은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잠을 청했습니다. 윗분들은 상담실 한 켠에서 한 두 시간씩 주무시고 오시곤 하셨지만, 언감생심 말단 2~3년차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습니다. 지하 문서고에서는 지난 시간 동안 쌓인 전표와 증빙들을 정리하곤 하였습니다. 퇴사 후 일이 있어 다시 회사를 찾았을 때, 관리팀 과장님이 ‘얼마나 전표 정리를 깔끔하게 해 두었던지 감탄이 다 나오더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말단은 그런 일을 하며 회사를 배워 나갔습니다.
돈을 다루던 업무 특성 상, 은행을 나갈 일이 많았습니다. 항상 은행을 나갈 때면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를 마다 않고 걸어 다녔습니다. 사무실 앞에 바로 마을 버스가 있었고, 은행 앞에서 내려 주었지만, 그렇게 걸어 내려갔다가 걸어 올라오곤 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사무실에서 오래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랄까. 간혹 입금해야 할 일이 생기면, 벽돌같이 생긴 천만원짜리 묶음을 몇 개씩 가방에 쑤셔 넣고는 은행까지 걸어다니곤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5만원권이 없었던터라, 1억 정도 가방에 들고 나가면 그 부피가 만만찮았습니다. 걸어가다가 혹시, 뒤에서 오토바이가 퍽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항상 뒤를 경계하였지만, 그래도 버스보다는 걸어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항상 그렇게 일하여도, 회사에서는 많은 돈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대기업 그룹군이니 급여가 적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사장님이 퇴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후 8시가 지나도록 하릴없이 사무실에 앉아 있을때는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퇴근 시간은 다섯 시 반이지만, 초과근무시간 한 시간이 자동 계산되어 여섯 시 반까지 근무하며, 그 수당까지 포함하여 연봉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런 식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전 7시 50분에는 출근하기 위해 아침 여섯 시에는 일어나서 버스에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길도, 오후 7시쯤 지나 퇴근길에 나서 저녁 9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도착하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쉽잖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사일을 덜하고 싶었습니다. 일 좀 하고나면, 오늘은 쉬어야지 하며 스스로에게 퇴근을 명하던 날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실 1층 매점엘 그렇게 뻔질나게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오후 네 시쯤, 매점에 내려가서 짜파게티 한 그릇 시켜 후루룩 먹고 올라오면 그렇게나 좋았습니다. 물이 조금 자작하게 끓여 내는 2천 5백원짜리 짜파게티. 거기에 약간 반숙 느낌 나는 삶은 달걀 반쪽 내어 오이와 함께 올려낸 것을 받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사직서 내던 날도 떡볶이 파티가 있었습니다. 외근나갔던 관리팀 직원이 들어오는 길에 사온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맛있게 먹고는 제 팀 파트장이던 차장님께 사직하겠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학교에 와서는, 항상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근무시간은 식사시간 포함 8시간이지만, 근무는 항상 집에서도 이어집니다.
한 주에 제가 수업하는 시간은 스물 두 시간. 저희 수업은 한 시간을 40분 수업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열 네 시간 40분 수업을 합니다. 그런데 특히 초등학교에서 근무해보면 그렇게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은 오롯이 제 시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항상 점심시간에도 아이들과 돌아가며 일대일 면담을 하는터라 그 시간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전담교사가 저희반 어린이들과 수업하는 시간도 무언가 여유를 가질만한 시간이 안됩니다. 업무 없던 6학년 담임교사 시절에는 이 시간 주로 과제물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직을 겸하던 담임교사 시절에는 이 시간 주로 긴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하곤 하였습니다.
온오프라인에서 워낙 많이 듣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반장 클릭 시키고 교사는 업무한다, 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분들 거의 없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교실에서 저희 반 어린이들을 만나는 시간은 배움에 몰두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동료 선생님 중 좀 답답해 하시는 분들은 계셨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연락이 안된다고. 그러나, 수업 시간에는 배움과 어린이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맞겠죠. 업무가 많아진 지금에도 업무는 어린이들 하교한 이후에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보직을 맡고 나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어린이들 돌아간 2시 반 이후부터 퇴근 시간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업무 없는 담임 시절에는, 방과 후에 남은 어린이들과 보드게임하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또는 어린이들이 제출한 제출물을 보면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곤 하였습니다. 교과서와 지도서를 보면서 수업 준비를 하는 것도 방과 후에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6학년 담임은, 방과 후 시간에 하루 두 시간 남짓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만 그 시간에 웬만큼의 해야 할 것들은 할 수 있었습니다.
보직을 맡은 후에, 과제물 혹은 배움 연구는 항상 퇴근 후의 일이 되었습니다. 집에 교과서와 지도서를 들고 다니는 일이 번거로와, 집에서 볼 수 있는 교과서와 지도서를 따로 챙겨 두었습니다. 물론, 지난 해 쓰던 것을 집에다 가져다 두고, 올해 것은 학교에서 참고합니다. 다행인지, 수업자료 만들어 배움을 설계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동영상이나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준비하거나 하지는 않고, 주로 성취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을 찾는 것에 조금 더 몰두하는 편입니다. 성취기준을 보면서 배움에 활용할 좋은 (텍스트) 자료를 찾는 것에도 집중하는 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영상을 만들거나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준비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도 퇴근 후에 기술적인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들에게 내는 과제만 줄여도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잘 배우는지 확인하기 위한 배움일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주제일기와 독서감상글, 그리고 배운 후 제출하는 이런저런 보고서들, 결과물들, 기록들... 그리고 어린이들이 제출한 것들에 그냥 싸인 하나 해서 돌려주고 싶지는 않으니, 하나하나 읽어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해 주고, 또 어린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회사 다닐 때와는 마음이 다릅니다. 아마도 하는 일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제가 하는 일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영업을 하거나 시공을 하는 일은 아니었으니 직접 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원가를 관리하고 현장을 관리하며 업체를 관리하는 일을 했으니, 비용을 줄여 이익을 늘리는 일을 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제가 하는 일의 목적은, 저와 함께 1년을 보내는 어린이들의 성장과 발달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어린이들이 역량을 기르도록 배움을 설계하여 운영하고, 자기 스스로와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교실 공동체라는 안정된 울타리를 유지하는 일을 해 나갑니다.
사무실에서의 삶은 직원 자신의 궁극적인 성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과업에 기여하지만, 과업을 사이에 둔 관계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회사를 그만 두던 시점에서, 현장을 관리하던 과장님이 결국 본사로 불려 올려졌습니다. 두 주 정도 인수인계를 했던 기억이 나며, 퇴사 후에도 한 3~4개월은 수시로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그 자리는 금새 대체됩니다. 퇴사한 후 6년쯤 지나고, 발령을 앞에 두던 시점에 경력증명서를 떼러 회사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과장님께서 우울한 표정으로 저를 한참 쳐다보시면서,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본사에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회사는 돌아갑니다.
뭐, 부득이하게 제 교실을 비우게 되는 상황이 있더라도, 아마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고, 교실은 새로운 선생님과의 관계망 속에서 금방 안정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실에서 만나는 저희의 고객들은 아마도 혼란스러움을 약간은 느끼게 되겠지요. 그래서 많은 학교는 최대한 담임 교사가 중간에 바뀌는 일이 없도록 학년 초에 미리 준비합니다. 육아휴직 예정교사나 출산 예정교사, 혹은 퇴직 예정 교사 등을 전담 교사로 배정하곤 하는 까닭은,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안정된 환경을 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해같은 초유의 상황에서, 그냥 대충 한 해만 잘 넘길까 싶은 생각이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올해는 실천(!)에 옮기기도 해 보았습니다.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그래도,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도, 교실에서 어린이들을 만나고, 온라인 클래스에서 어린이들의 제출물을 열어보고, 원격 화상 플랫폼에서 어린이들을 마주하다보면, 다시 교사는 몰두하고, 집중하고, 관계해 나갑니다.
휴게실에 가서 누워 있고 싶은 생각 잠시 접고, 문서고에 가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 튕겨 내고, 멍하니 앉아서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맡겨야겠다는 생각 거두어 내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어린이들의 발달과 성장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자긍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