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제대로 된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15. 제대로 된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기억입니다. 전체 여덟 반이었던 6학년 교사들은 서로 학년 업무를 나누어 맡고 있었습니다. 학년 업무의 개념이 - 지금도 그렇지만 - 희미하던 시절, 저는 ‘학습지 등사해서 연구실에 두었으니 반별로 찾아가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면서 기계적으로 챙겨서 교실 캐비넷에 넣어 놓곤 하였습니다.그게 학년 업무인지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대로 하던 시절. 그런데 학습지 사이사이에 단원평가지가 놓여 있는 것이 놀라워 해당 선생님께 ‘도대체 이 단원평가지는 어디에서 구한 것이에요?’라고 여쭤봤던 적이 있습니다. ‘다운받았죠.’ 음? 다운?
그렇게 단원평가지를 다운로드 받던 사이트가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이트 한 군데에서 가정용온라인 학습 서비스를 런칭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교사들에게 단원평가지를 제공하던 저 사이트가, 이제 가정용 온라인 학습 서비스를 통해 저런 단원평가지를 이용하지 않을까, 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담당 선생님이 주는 그 사이트의 단원평가지는 캐비넷에 쌓아놓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가정 온라인 학습에서 단원평가지 문항을 미리 보고 오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럴리 없고, 그러지도 않겠지만, 자기 검열이 생기게 된 것이죠. 합리적 의심.
요즘은, 교사에게 제공하는 USB에 단원별 형성평가 및 단원평가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번 온라인 등교 상황에서 모든 학생들이 그 존재를 알게된 e학습터에, 문제은행 식으로 평가문항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십만 문항이 넘어가는 e학습터의 문항 중, 교사가 단원평가를 위해 범위/난이도 등을 고려하여 무작위로 선별한 후, 이를 토대로 단원평가를 치루어도 됩니다. 이제 특정 업체에서 제공하는 단원평가지 말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단원평가를 간추려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단원평가에 대한 의문은 듭니다. 사실, 단원평가의 형식은 굉장히 천편일률적입니다. 문항 스타일은 시중 문제집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인데다가, 대부분 20문항 100점 배점을 의도한 형태, 그리고 객관식과 주관식이 적절하게 섞여있는데다가, 문항 앞머리에는 개념을 물어보다가 뒤로 갈수록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배움을 적용해야 할지 묻는 문항들로 채워지는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교실 바깥에서 이미 지긋지긋하게 문제들을 푸는데 굳이 단원평가라는 이름으로 같은 방식의 문제를 풀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단원평가이기 때문에 그 문항 형식도 단순하고 간결합니다. 생각의 여지가 허용되지 않고, 채점의 편의만 고려된 문항의 형식.
그럼, 단원평가를 풀 수 있으면 아이들은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아이들은 이미 교실 배움 이전에 꽤나 많은 문항을 해결하고 오곤 합니다. 사교육에서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앞선 배움은, 이해 없는 기능으로 무장한 아이들에게 단원평가 만점을 제공하곤 합니다. 그러나 교사는 압니다. 이 아이는 교실 배움에는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그저 단원평가 점수만 좋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런 학생들은 반드시 탈이 납니다. 왜냐하면, 학년이 올라가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학교의 교사가 단원평가 뿐만 아니라 수행 및 지필평가를 출제한다는 것이며, 그 범위는 교과용 도서의 페이지로 표시되지만 실제 내용은 교실에서 배운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실 배움에 소홀하면서도 최상위권의 성취를 보이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잘 하는 것 같은데, 점점 교실 성취가 떨어집니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도 그런 학생들이 보입니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간결하고 단순한, 그 단원평가도 만점을 받지 못하는 학생은, 이미 교실 배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실수라고 말하는 학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가 반복되는 학생들의 평소 교실 배움의 모습에서, 집중력이 조금씩 결여된 모습을 언뜻언뜻 관찰하곤 합니다. 그래서 학부모 상담 때 직접 말씀드릴 때도 있습니다. 과도한 교실 바깥의 배움, 그리고 넘치는 과제 덕택에 아이는 학교에 와서 쉰다는 말씀. 쉬는 시간 뿐만 아니라, 배움이 이루어지는 수업 시간에도 줄곧 넋을 놓고 쉬는 아이들...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은 고착화됩니다. 학원을 그렇게 보내고, 과외를 그렇게 시키는데, 왜 우리 아이 수학 점수는 그대로일까요. 그래서 요즘 교육 현장에서도 ‘아동 번아웃’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가 봅니다.
단원평가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성취를 정량화하도록 만듭니다. 매년 한 두 명씩 단원평가 결과를 미리 묻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 저 단원평가 몇 점이에요?’ 아래에서 두드리겠지만, 저는 정량화된 결과가 나오지 않는 방식의 단원평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약간은 당황해서 되물었습니다. ‘점수는 뭐하러 물어?’ ‘백 점 받아야 용돈을 받을 수 있거든요.’
부모가 학생 성취를 정량화하여 받아들일 때, 아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백 점 짜리가 다 같은 백 점 짜리입니까. 학교다닐 때 저의 경우는 스스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평가에서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문항에 대해 항상, 비록 맞았다고 할지라도 꼭 다시 확인하고 넘어갔습니다. 정량화 된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닌,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아닌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스스로의 성취를 정량화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스스로 이루는 성취의 과정은 점차 희미해지고 결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수학 교과의 경우, 과정을 존중하지 않으면 항상 그 결과는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수학적 귀납법이 잘 보여주듯, 수학의 추상을 엄밀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주는 긴장감을 위해 단원평가 같은 형식의 시험을 겪을 필요도 있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단원평가를 치룰 때 어린이들이 그렇게 크게 긴장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는, 너무 과도하게 긴장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들은 이미 지긋지긋하도록 풀어봤던 문항들의 형태이기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냥 풀어서치워버립니다. 20문항 100점짜리 단원평가를 보려고 평가지를 나눠주고 시작하면, 한 10분도 안 되었는데 엎드리거나 다 했다고 손을 흔드는 어린이들이 너댓명, 대여섯명씩 나오곤 합니다. 관찰 결과, 그런 어린이 중, 만점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들이 꽤 됩니다. 그런 방식의 평가를 치루지 않은지 꽤 되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로 연결할 수는 없지만, 대략 다 했다고 손 흔드는 아이 중에 절반 넘는 수는 만점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린이들은 평가라는 중압감이 짓누르는 바람에 평가 내내 당혹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어려워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물에 대한 공포를 없앤다고 물에 계속 집어넣는 행동. 요즘은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어린이들의 트라우마만 키우는 행동임을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원평가를 치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아이들의 성취를 총괄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은 적절치 않습니다. 대부분 사용하고 있는 평가 문항이 단순하고 표면적이며, 평가 결과 분석의 편의를 고려한 간결함이 그 특징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성취의 파악이 어렵습니다. 총괄적인 평가가 주는 결과지향적인 성격이 학생 성취에 대한 착시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상당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이에게는 성취를 평가하는 것을 너무 무디게 받아들이도록, 어떤 어린이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시행되는 단원평가를 치울 필요가 있습니다.
매 시간 물어야합니다. 소위 말하는 형성평가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형성평가의 활성화에도 조건이 필요합니다. 앞선 글에서 두드렸던 것처럼, 교과용 도서의 진술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성취기준을 달성하기 위하여 단계별/유형별로 접근하는 체제를 교과용 도서가 계속 유지한다면, 형성평가 또한 단원평가를 매 시간 나누어 보는 것에 다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성평가가 활성화되려면, 매 차시 배움의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 내용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진술되어야 합니다. 백워드 설계 같은 교육과정 설계 방법은 배움의 매 시간, 학생들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내용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려줄 것이며, 교사는 이를 형성평가의 형태로 매시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 시간의 형성평가는 교과용 도서의 문항을 통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과용 도서의 문항 중 많은 수가 학생 배움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배움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 간 공유된 내용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항의 개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묻고자 하는 내용을 배움일지에 답하도록 하고 매 시간 걷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쓰이는 개인용 화이트보드 같은 것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의 반응을 루브릭으로 만들어 확인할 수 있으며, 다음 시간 배움의 시작 지점을 선정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매 시간, 정해진 교과용 도서의 문제를 정해진 풀이 방식을 적용하는 것을 배움으로 가진다면 학생들은 정해진 방식의 풀이 이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꼭 단원평가를 보아야 한다면, 평가 문항은 교사와 학생이 공유한 배움의 내용을 묻는 것이어야하며, 평가를 통해 배움을 다시 구축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성취수준 도달의 차이가 드러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학생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환류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함께 배운 내용을 토대로 아래와 같은 단원평가지를 만들어 학생의 배움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선 함께 공유한 배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묻는 문항이어야 합니다. 교실 바깥에서 미리 배워 왔더라도,교실 배움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질문을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교실 배움을 더특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교사 스스로의 교육과정 설계 및 운영이 필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평가는 또한 지금까지의 배움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교실 배움의 맥락을 따라 평가 문항이 주어지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는 배움을 조각조각내어 부분부분 확인하는 것이 아닌, 전반적이고 총체적이며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의 배움을 확인하게 도와 줄 것이며, 혹시 배움이 정리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정리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평가는 학생 개개인이 도달한 성취수준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나 다 자신의 배움이 드러날 수 있는 문항이어야 합니다. 객관식이나 단답형 혹은 서답형처럼, 문항 전체의 흐름 중에 하나라도 놓치면 전부를 놓칠 수 밖에 없는 문항이 아닌, 학생 자신이 알고 파악하며 체화한 배움이 전반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평가 문항의 구성을 통하여, 단원평가가 단원의 끝이 아닌, 배움을 되짚고 확인하며 부족한 부분을 피드백해주는 환류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단원평가가 단원 마지막 시간이 아닌, 단원의 중후반에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원평가 이후, 학생 배움이 다시 한 번 확인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가에 대해 학생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메타인지적인 사고 과정을 위해, 평가에 대한 평가가 학생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문항이 구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평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특히 초등학교 교실에서 수학 평가는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평가가 학생의 수준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수준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기틀이 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학생의 수준은, 어려운 문제를 더 많이 풀 수 있도록 만드는 류의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교실 배움 참여에 대해 스스로 확인하고 자신의 성취수준 정도를 스스로 파악하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배움을 되돌아보고 계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가가 그것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