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엇을 위한 연습인가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1. 무엇을 위한 연습인가
수학 교육과정 관련 연수에 갔을 때, 강의하셨던 교대 교수님께 여쭌 적이 있습니다. 수학을 잘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교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뭐, 연습을 시켜야하지 않을까요?
초등학교 수학에 대해 좀 안다는 이들이 최후의 순간에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단어가 바로 '연습'입니다. 수학과 관련된 담론이 오고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쉽게 휘두르는 단어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저는 수학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의도적으로 '연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평균 80점 중반 정도였던 학교 시험에서 항상 7, 80점대를 오르내리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불현듯 수학을 잘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중 2 겨울방학, 동네 속셈학원에서 주 3회 1시간 반씩 하는 수학 강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1년 조금 넘게 다니는 동안, 주로 대학생 혹은 갓 졸업한 분들 연배 정도였던 강사 선생님은 세 번이 바뀌었습니다. 강의 시간은 문제 풀어주시며 설명하시고, 풀어보게 시키시고, 또 설명하시고 시키시는 전형적인 보습학원 스타일이었습니다. 매 시간 과제가 있었고, 답안지는 찢어 제출하였기 때문에 참고할 수 없었습니다. 30년 전인데, 지금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방식으로 운영되던 평범한 동네 학원.
중 3 때 학교 수학 선생님은, 50대 중반 쯤 되시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크셨던 옆반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업하셨는데, 재미있게 가르치신 덕택에 수업 시간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듯 싶지는 않은데 여하튼 수학을 잘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징후(!)로 미루어보건대 800명 넘던 같은 학년 아이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는 확실히 들게 되었던 듯 싶습니다.
시험 점수가 좀 나오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학교 수업 만으로 중 1, 2학년 과정을 배웠기 때문에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어, 기본기를 좀 탄탄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공문수학'을 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공문수학을 하는 친구들을 보니 매주 학습지를 받아 보는 듯 싶어, 저거라면 조금 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방문 교사도 온다던데 사는 형편도 부끄럽고 해서 학습지만 받아보는 것으로 신청했고, 테스트를 본 후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실력'으로 판정받아 초등학교 6학년 내용의 학습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수학 잘 한다고 알려진 덕택에 다니던 학원의 수강생도 조금 늘었댔는데 그런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수준으로 판정받은 것도 좀 웃겼지만, 막상 학습지를 받아보고 나서는 더더욱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용되는 수만 바뀐, 하나의 패턴이 반복되는 수십 개의 연산 문제. 처음에는 받은 학습지를 매일매일 풀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차함수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데, 학습지 안에서는 분수와 소수의 연산을 하고 있으니... 의무감에 학습지를 펴 들었지만, 그 시간은 정말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걸 앉아서 부질없이 푸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놀기나 하자, 생각하며 배달되는 학습지를 차곡차곡 보관하기 시작했고, 풀지 않은 꾸러미가 1년 넘게 쌓이기 시작한 고 1 쯤에 결국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수학을 잘 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며, 연습을 통해 연산/문제 해결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수학은 그저 짜증나고 재미없는 지긋지긋한 과목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수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점점 사라지고, 학생들은 수학을 가면 갈수록 더 어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 학생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교실과 강의실에서의 이러한 연습은, 이해를 쏙 뺀 채 기능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해 없이도 기능을 익혀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잘 해 내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교사나 강사가 필수 유형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여준 후 유형 연습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면 알아서 척척척 풀어내는 것입니다. 가드너 식으로 말하자면 수리 지능이 조금 더 발달하였기 때문에 필수 유형 문제 풀이 전 흘러가듯이 설명하는 개념이나 원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학생들일 수도 있고, 혹은 기능과 적용 사이의 구조를 잘 연결한(또는 하여 준) 덕택에 개념이나 원리에 대한 이해가 빈약함에도 능숙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줄곧 (드러내놓고 혹은 속으로) '왜 이런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 건데요?'라고 되묻습니다. 왜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해결하는지를 이해하기에는 적잖게 빈약해 보이는 설명 끝에, 이렇게 하면 돼, 라는 마무리에 학생들의 의문은 풀리지 않고 혼란스러움만 커집니다. 그리고 더 많은 학생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기능과 적용 사이를 구조적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뿐입니다.
누군가 하기 때문에 나머지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러한 연습 중심의 방법. 가장 빠르게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효율지상주의적 관점이 수학 교육 아래 짙게 그림자 드리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언론보도를 통해, 어린이들이 처음으로 수학에 대한 어려움을 느낄 때가 분수를 배울 때라고 보도된 바 있습니다.
분수를 왜 어려워할까. 분수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수학 기호이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 수행한 과제는 전체 과제의 2분의 1'과 같이 분수를 사용하여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나타낼 때, 전체를 나타내는 실제 양과 상관없이 부분에 대한 전체의 값은 1을 나타내게 됩니다. 전체를 1로 나타낸다는, 어찌보면 추상적인 개념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웁니다. 어린이들의 발달을 생각할 때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학교 1학년 일차방정식을 배울 때를 생각해보면 이를 더 잘 체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일차방정식 활용 문제 중에 '거속시'나 '농도' 상황을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 할 것이라 생각하시지만, 많은 학생들에게 가르쳐 보았을 때 '일'에 대한 문제의 이해를 가장 어렵게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습니다. 예컨대,
형돈이가 4일동안 일할 때 끝내는 일을, 재석이는 12일동안 일해서 끝낼 수 있을 때, 형돈이와 재석이가 함께 일한다면 두 사람은 며칠 만에 이 일을 끝낼 수 있을까
같은 문제 상황입니다. 이 문항은 '일(과업)'의 절대적인 양(값)이 수치로 나타나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을 '1'로 추상화하는 작업부터 해야합니다. 끝내야 하는 일의 양을 1이라는 수로 놓아야, 아이들은 비로소 형돈이는 하루에 전체 일의 4분의 1을 수행하며, 재석이는 12분의 1을 수행한다고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을 도통 쉽지 않아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추상화되는 분수를, 초등학교 3학년이 받아들이는게 당연히 쉽지 않을 수 밖에요.
더 나아가, 피자 다섯 조각을 자꾸 '피자 8분의 5판'이라고 나타내는 상황쯤 되면, 수학은 본격적으로 실생활과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수학을 잘 못하면, 교사와 강사는 자꾸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일단 풀어'라고 말합니다. 연습이 배움의 현장에서 하는 역할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하게 두드리겠지만, 정말 웃기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실이 지닌 생활 속 여러 갈등과 문제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고 최대한 상황을 이해하여 조심스럽게 대처하려는 생각들이 확산되고 있는데, 배움에 대한 어려움, 특히 수학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학생들에게는 그 처방이 획일적입니다. 연습이 필요해. 무얼 위한 연습입니까.
제 옛날의 경험 하나. 세 번째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개인과외로 만난 중학교 2학년 여자 어린이는, 항상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돼요? 그 당시 제가 그저 연습을 강조했었습니다. 풀다보면 할 수 있게 되고, 하다보면 이해하게 돼. 그것은 이 아이가 하게 될 것이 축구인지, 발야구인지, 혹은 족구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계속 공을 발로 차는 연습을 시키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일단 차게 하는 것. 그저 연습만 시키는 것.
선 이해 없이도 그저 잘 해 내는 학생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수학이야말로, 잘 하는 학생들을 보며 안심하거나 위안을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사들의 수업 후기를 보면서 간혹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매끈하게 잘 정돈된 어린이들의 결과물, 그리고 뿌듯함이 담긴 교사의 멘트. 그 때마다 저는, 어려워했기 때문에 매끈하지 못한 학생들의 결과물을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듭니다. 물론 노파심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훌륭하게 성취했을 것이고, 교사가 그 중 아무거나 골라 내어놓은 것일텐데, 아마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교사와 강사는 가장 어려워 한 학생의 결과물을 손에 쥐고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포자', '체포자', '국포자', '실포자' 같은 말은 없지만, '수포자'라는 말은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스스로를 자조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연습입니까. 왜 연습을 시켜야 합니까. 연습해서 학생들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능숙하게 기능을 활용하게, 매끈하게 적용하는 것. 그런 수학 수업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런 수업을 통해 지금 우리 아이들이 잃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글은 '연습'이라는 단어를 수학 교육의 최후의 보루인 양 끼적거리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 교실 안팎에서 생각해 봐야 할 열 여덟 가지 이야기의 첫 편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20210923 글을 매끄럽게 가다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