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정조 시기의 개혁정치 1
필요한 배경지식 1. 임진왜란 이후의 경제적 변화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은 5학년 2학기와 6학년 1학기, 두 학기에 걸쳐 역사 영역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 적용되는 2015 개정 교육과정 5·6학년군 사회는 역사 영역을 5학년 2학기에 모두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6학년에 올라온 아이들은 작년에는 2009 개정 교육과정 하에서, 올해는 2015 개정 교육과정 하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과정이 중첩되거나 삭제되는 일이 발생하여, 올해 6학년은 보완단원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역사를 추가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계속 6학년 담임을 한다면 아마도 올해가, 교육과정이 다시 바뀌지 않는 한 맞이하는 마지막 역사 영역 수업이 될 것입니다.
바뀐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조선 후기 시대사를 처음으로 배우게 됩니다. 해당 성취기준은
[6사04-01]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와 서민 문화의 발달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의 변화 모습을 탐색한다.
입니다. 그래서 주로 다룰 주제는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
서민 문화의 발달
이 될 것입니다. 이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하여 우선 임진왜란 이후의 경제적 변화의 원인과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워드: 조선 전기의 세금제도
조선 전기의 세금제도는 흔히 조·용·조라고 하는 제도로 운영되었습니다. 중국 당나라에서 시행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여 조선 전기의 주된 세금제도로 운영된 조·용·조 제도는 쉽게 말하자면 소득에 대한 세금, 군역과 요역에 대한 노동, 특산품의 현물 납부를 말합니다.
농업이 주된 산업 구조인 조선은 토지에서 거둔 수확에 대해 세금으로 쌀을 받아 재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그에 부가하여 농한기에 남성 장정을 대상으로 관청을 짓거나 성벽을 쌓는 등의 일을 하거나 전쟁을 대비하여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군역과 요역)을 의무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특산품을 현물로 바치는 의무도 두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세금 제도 운용에 큰 문제가 닥칩니다. 처음에는 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일컫던 양반이, 점점 신분 계층화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엄밀하게 벼슬을 하는 사람만 양반으로 불리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선생님이 정년퇴직하였다고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르지 않고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벼슬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 양반으로 여겨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분제의 윗자리에 자리잡게 되었고 특권계층화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세금 납부의 의무로부터도 면탈하게 됩니다.
조금씩 평범한 사람들에게 세금 납부의 부담이 커지는데, 더 큰 문제는 바로 특산품을 바치는 공납제의 운용에서 벌어집니다.
왕실이나 관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각 지역의 특산품을 가정별로 바치도록 하였는데,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특산품 - 인삼이니 전복이니 귤이니 나전칠기니 등등등 - 까지 챙기는 것이 어려워진 터라 정부에서는 방납 제도를 통하여 특산품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방납은 쉽게 말하면 구매대행 같은 것이죠. 바쳐야 할 특산품을 방납인에게 구매하여 관에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관리들과 방납인이 중간에서 비리를 저지릅니다. 굳이 방납인을 이용하지 않고 특산품을 구해다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의 특산품을 관에서 받지 않는 것입니다. 물품에 하자가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방납인을 연결해주고 구매하여 오라고 대놓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납인에게 가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면서 사라고 말하고... 중간에서 평민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특산품을 구매하고, 방납인은 이렇게 벌어들인 폭리의 일부를 관리들에게 뇌물로 상납합니다.
공납의 폐단이 극에 달한 것이 조선조 명종 때로, 그래서 임꺽정이라는 유명한 도둑이 활동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시대입니다.
선조 임금이 즉위하여 여러가지로 시스템의 개선을 논의하면서 이 공납의 폐단도 바로잡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던 차,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키워드: 대동법
햇수로 7년동안 한반도를 뒤덮었던 임진왜란의 여파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경작지의 황폐화였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 뿐만 아니라, 왜군, 명나라 군대, 그리고 조선 군대의 사이에서 시달리면서 자기 거처를 떠나 유리하고 방황하는 일이 벌어진터라, 제대로 된 농사가 이루어질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록에는 임란 이후의 경작 가능한 농지가 임란 전의 50~70%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금 개혁의 논의는 이렇게 농민들이 처한 어려움 속에서 비로소 본격화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마치 서부 유럽이 1348년의 흑사병으로 3분의 1 가량의 인구를 잃은 뒤에야 농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고 농민의 지위가 상승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동법은, 특산품을 현물로 바치던 것을 쌀로 바치는 것으로 바꾸면서, 가호(한 가족) 단위로 징수하던 것을 토지 단위로 바꾸어 내도록 한 제도입니다. 방납 제도의 폐단을 줄이면서 농한기에 농민이 직접 특산품을 구해다 바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제도를 개선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징수 단위도 가호에서 토지 단위로 바꾸면서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계층에게도 세금 납부를 강제했다는 점에서, 굉장한 제도 시행의 반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08년(광해군 1년)에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작된 대동법은,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친 끝에 숙종 임금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습니다. 근 백 년의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대동법은 쌀로 받은 세금(대동미)을 공인이라는 새로운 업자에게 위탁한 후, 이 공인으로 하여금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오게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금을 납부하던 사람들이 방납인과 거래하도록 한 것에서, 정부가 직접 공인과 거래하여 필요한 물품을 충당하게 된 셈입니다.
키워드: 물물교환에서 현물 화폐로, 명목 화폐로
대동법 시행의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드디어 화폐의 기능을 하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우리나라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을 운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처럼, 조선 전기에는 농사짓고 채집하고 만들어서 사용하는, 마을 단위에서의 물물교환 이상을 넘지 않는 그런 자급자족의 시스템을 운영하였습니다. 한양도성도 별다를 것이 없어 관에서 쓰는 물건을 구해다 바치는 몇몇 상인들만 도성 내에서 활동할 뿐, 서비스업이 자리잡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대동법이 시행되고 공인이 특산품을 구하러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물건을 사고 댓가를 지불하는 상업적 행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됩니다. 서로간 필요한 물품을 일대일로 바꾸던 물물교환에서, 세금으로 받은 쌀이 물건의 거래를 매개하는 화폐, 즉 현물화폐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명목 화폐, 즉 엽전이나 어음 등으로 바뀌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쌀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 간편하게 화폐를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돈이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특산품을 구하여 공급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전에는 농사 짓다가 관에 바칠 특산품을 잠깐 잠깐 구하러 다녔다면, 이제는 아예 전문적으로 관에서 필요로 하는 특산품만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셈입니다.
키워드: 장시(시장)의 발달과 상인 계층의 성장
그렇게 특산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 공인과만 거래할 리가 없습니다. 돈이 돈을 부르는 법이니까요. 이제 다른 판로를 찾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물건을 거래하는 모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곳은 더이상 물물교환으로 물건을 바꾸지 않습니다. 돈은 돌고, 거래는 돈으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굳이 들고 갈 필요없이 돈만 들고가면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래 상대방도 돈을 원하였구요.
지금 각 지역별로 존재하는 5일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격적으로 장시가 서고, 상인들이 상업적 행위를 통하여 부를 축적합니다.
마치 서구 유럽의 지리상의 발견 이후 닥친 어마어마한 부의 유입과 함께 거래가 넘쳐나던 시대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물론 사이즈가 다르긴 합니다. 결국 서구 유럽은 이러한 부의 축적를 기반으로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에까지 도달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부의 축적으로는 선대제 수공업 이상의 산업 구조를 갖는 것은 불가능 하였습니다. 아마 자본주의 맹아론이 가지는 맹점이 이러한 구조적이고 물리적인 불가능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어쨌든 이렇게 상업적 부를 축적하는 계층이 생겨나는데, 이들은 당연히 양반 신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강력한 유교적 질서 아래에서 상인 계층에 종사하는 사람은 지배계층이 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평민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가 조선 후기 사회에 넓게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