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학급운영] 8. 가장 잘 가르치는 선생님
가장 잘 가르치는 선생님
잘 가르치는 선생님. 교단에 서기 전에는 초등학교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단 초등학교 교사 뿐만 아니라 모든 교사에게.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고, 교사가 가르치면 아이들은 배우니, 가장 잘 가르치는 교사야말로 교사의 제일 덕목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섣부른 생각이었습니다.
교사가 되어보니, 학교가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임에는 분명하지만 초등학교는 그것만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은 아이들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공간입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키도 자라고 몸무게도 자라고, 인간관계도 자라고, 협동의 가치도 자라고, 지식도 자라고, 방법도 자랍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뭉뚱그려 '교사가 수업 시간에 가르친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아이들이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으로는 이 모든 것을 오롯이 자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중에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저 지식의 성장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요당하는 아이들의 현실입니다. 지식은, 조금 늦게 가다듬어가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초등학교 때 무엇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하질 못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그저 에피소드들 뿐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도록 한 이런저런 사건과 경험들 중에서도 아주 약간. 물론 기억나지 않는 그 시간에도 분명히 배움을 통해 제 안에서는 무언가가 구성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성된 지식의 크기보다는, 아마 지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법과 지식을 구성해가기 위한 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어가는 수업의 전체적인 흐름이 지금의 제가 있도록 하는데 더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의 그 쥐꼬리만큼도 안되는 지식을 누가 얼마나 더 많이 알고 있는가를 겨루는 일에 벌써부터 매몰되어, 지식을 구성체를 이루는 거대한 구조물은 보지 못한채, 초등학교를,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니, 아마 초등학교를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도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여지없이 그저 흘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교사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장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야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판단합니다. 우리 선생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초등학교에서는 조금 덜, 중고등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그에 대해 더 잘 알고 느낍니다. 다만, 아이들도 학부모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사가 아무리 '잘 가르쳐주고' 싶어도, 어떤 순간에 멈칫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배우다가 불현듯 멈칫, 하는 순간은 바로, 아이들사이의 편차가 느껴질 때입니다. 어떤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데, 저쪽의 다른 아이들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교사는, 멈칫, 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사가 잘 가르치느냐 잘 가르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단순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학교 교사는, 초등학교 교사도, 중고등학교 교사도, 그 수준이 꽤나 높습니다. 특히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교사가 된 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강의력에서는 편차가 있다 할지라도, 실력 자체를 의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사는 아이들의 편차 앞에서 멈칫, 하는 순간을 항상 마주합니다. 학원 같은 곳에서야, 저도 강의해 보았지만, 결국은 어느 순간에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놓아버립니다. 왜냐하면 학원은 효율적으로 기능해야 하는 곳이고, 결국 (속된 말로) 돈값을 할 필요가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이를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긴, 효율성을 따지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을 제각기 역량에 맞게 키워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공교육의 살 길도 있고, 교사의 나아갈 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른 의미에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가장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을 토대로 그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전달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배움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마중물이 되어주는 역할로써 말입니다.
결국 학교 현장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기 위한 첫 번째 덕목으로, 저는 교사의 앎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앎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앎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를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요즘 교육 현장의 화두가 되는 교육과정 재구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성취기준에 아이들이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는 교과서입니다. 그러나 교과서는 평균적인 도구입니다. 평균적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도구일 수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누군가는 학생이 될 수도 있고, 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평균적인 교사가 사용하여 평균적인 학생들을 배우도록 만드는 평균적인 도구인 교과서. 평균은 무난하지만, 우리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조금 다르게 배울 수는, 즉 성취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을까요?
교사의 앎이야말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저 전달하기 위한 앎이 아니라, 앎에 도달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구성함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의 배움을 구축하기 위한 앎입니다. 특히, 열 과목을 담당하는 초등학교 교사야말로 그 모든 것에의 앎을 힘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일례를 들어,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들어온 소프트웨어 교육이 있습니다. 5, 6학년 학년군에 1년 17시간의 소프트웨어 교육이 올해부터 초등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코딩을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절차적 사고나 알고리즘, 블록 기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한 리터러시를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현장의 교사가 이에 대한 전반적인 앎을 알지 못한다면, 지속적으로 교수-학습 방법 노하우만이 오고가는 연수, 엔트리나 코드오알지 같은 배움의 도구만 줄창 오고가는 연수만 반복됩니다. 요즘은 이솦이라는 사이트를 알려주더군요. 이걸 사용하여 학교 현장에서 소프트웨어 수업을 하라는 이야기일텐데... 이런 방법 중심, 도구 중심의 지식 전달은, 교실 현장에서도 교사로부터 아이들에게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는 없다'. 우리 교사를 넘어설 수 없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실은 교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의 앎은, 어찌보면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하면서, 지속적이며 광범위하게 꾸준히 해 나가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교사의 앎이 쌓여야,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 자체가 아닌 지식을 향한 경로를 안내해 주는 수업을 함께 겪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앎이 커진 교사를 통해 아이들은 앎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하여 제각기의 역량에 걸맞게 자신의 배움을 실현할 것입니다. 편차가 있어 보일수록 더더욱 이러한 과정은 필요합니다. 배움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6학년 교실에서부터, 아이들이 성장하고 발달하기 시작함으로써,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점차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자신이 찾아낸 길을 스스로 확장하고 가지치기 해서 결국은 더 넓고 깊은 배움을 이뤄낼 것입니다.
저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순간이 불현듯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전에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배웠는지 잘 기억도 안나고 관심도 특별히 갖지 않았지만, 중학교 2학년의 어디쯤에선가, 스스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채워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는 방치되어 있었지만, 학교 담임 선생님의 관심과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야할 바를 고민하여 알게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원을 다니면서 학교 수업에서 뒤떨어진 부분을 스스로 보충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 속에서, 모든 아이들이 배움에 관심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 교실 안의 누군가는 이미 흥미를 가진 상태이고, 누군가는 흥미는 없지만 공부를 하고 있는 상태이며, 누군가는 아직 흥미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고, 누군가는 흥미도 없는데 억지로 끌려다니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생각지도 않았던 누군가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불현듯 찾아온 앎에의 호기심과 갈망을, 준비된 담임 교사의 앎과 앎에 대한 태도가 채워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사가 늘상 준비하고, 늘상 공부하는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한다면, 마치 가정에서 부모의 삶의 태도가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사가 공부하지 않을 때, 앎의 바운더리를 넓히지 않을 때, 6학년 교실에서 1년 내내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도 알고, 학부모도 알게 되며, 교사 스스로도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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