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이야기] 2. 자녀를 믿으셔야 합니다
6학년 담임을 7년째 하지만, 올해는 너무 많은 학부모님께서 방문상담 하셨습니다. 열 여섯 분. 내일 한 분이 더 남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학부모님과 면대면하여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상담 시간은 한 시간 씩으로 잡았습니다. 보통은 2~30분 씩으로 정하는데, 그렇게 하면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없어 시간은 넉넉하게 잡는 편입니다. 말씀이 길지 않으면 일찍 가실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 더 계시기도 하시고 그렇습니다.
올해는, 오셨던 어머니께서 그 다음 날 아버님 모시고 한 번 더 내방해주신 경우도 있으셨습니다. 덕택에 저녁 아홉 시 넘어 학교를 나섰지만, 뭐, 괜찮습니다. 아이를 키워가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아버지께는, 2학기 때도 함께 오십사 조심스레 말씀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내 자녀를 믿지 못하는 학부모
아무래도 주로 말씀 나누는 것은 학습에 대한 것입니다. 잘 하는 아이들은 잘 하는대로, 조금 부족하다 여겨지는 아이들은 부족한대로, 학부모님께서는 항상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많은 학부모님께서 놓치고 들어가는 부분은, 아직 우리 아이는 어리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구닥다리 이론일지도 모르지만, 피아제의 발달이론은 12세를 구체적 조작기에서 추상적 조작기로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말합니다. 이 때 12세는, 우리 나이로는 중학생을 말하겠지요. 12세 이상 관람가는, 중학생 이상 관람가를 말하기도 합니다. 오신 학부모님 중에, 12세 이상 관람가이니 자기는 이 프로그램 보겠다고 하는 자녀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건 중학교 가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설명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그러나 12세가 된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추상적 조작기에 접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추상적 조작이 무엇입니까. 일반화하는 역량에 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학부모님들은 아직까지 그럴만한 발달이 없는 아이들에게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될 것을 '강요'하시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같은 문제에 여러 차례 조언할 일이 생길 때, 절대로 언성이 높아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많이 벌어지는 일이죠.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니?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어, 안했어!'
교사든 학부모님이든 아이들에 대한 실망감일 수도 있고 짜증일 수도 있겠지만, 감정을 힘껏 분출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잘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 번 이야기해서 듣는 것은, 사실 어른들도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컸다고, 한 번, 혹은 두 번 이야기한다고 듣길 바라십니까.
성경에는 그런 구절이 있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 세 살, 우리 나이로 열 한 살 혹은 열 두 살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같은 일로 백 번 째 혼내도 언성을 높일 필요 없이 조곤조곤 말해주면 됩니다. 선생님이 혹은 부모로서 무엇이 문제된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백 한 번 째 또 같은 일을 하면 그 때도 백 번 째처럼 조곤조곤 말해주면 됩니다.
아이들에게 학년 초에 항상 웃으면서 말해줍니다. 선생님은 같은 잘못을 백 번 하더라도, 항상 알아듣게 조곤조곤 이십분이든, 한 시간이든 화내지 않고 설명해 줄거야.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선생님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안내하고 설명해줄테니, 잘 지내보자. 물론 아이들은 그게 더 무섭고 겁이 난다고 하긴 하지만요... (하하)
학부모님 중에, 아이들에게 박탈의 벌을 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스마트폰을 압수한다던지, 아니면 컴퓨터 하는 시간을 못하게 한다던지 하는 것이죠. 저도 저희 아이들에게 해 보았던 것입니다. 어른의 생각으로는, 박탈의 기간동안 아이들이 부재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박탈당한 그것에 대한 생각에 머물 뿐이라는 사실.
소리질러 화내면 아이들이 감정은 부모가 화 낸 그것에 머물 뿐입니다. 아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박탈하면 아이들의 주의력은 박탈당한 그것과 그 일에 머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육적 효과는 없고, 부모와 자녀 간의 정서적 안정감만 깰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못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박탈을 통한 교훈에 도달하기를, 부모의 화 난 감정을 전달함으로써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되도 않습니다.
그리고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벌써부터 미래를 준비하라고 다그치기에 여념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많이 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얼마나 살았느냐. 아이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며 자신들은 열 세 살이라고 목청높여 부르짖습니다. 그 때 아이들에게 말해줍니다. 너희는 아직 인생을 한 두 해 정도 밖에는 못 살았다고. 그러면 아주 난리가 납니다. 못 알아듣겠다는 것이죠. 그 때 설명해줍니다.
대체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자신의 판단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법이 없는 듯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순전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점차로 호불호가 생겨갑니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여서 하던 것에 대한 호불호도 쌓아갑니다.
마음에 무언가 쌓여가지만 그저 말하지 않고 이를 감내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견디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어느 순간 그게 드러납니다.
부모와 감정적으로 치고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대놓고 말은 못하면서 그저 태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업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부모가 원하는 것을 점점 게으르게 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집중력을 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눈속임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4학년 때부터, 점차적으로 그런 아이들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이를 뭉뚱그려 '사춘기'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많은 학부모님들께서는 그저 '우리 아이가 사춘기인가봐요'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결국 부모와 자녀 간에 정서적인 안정감이 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한 가운데에 학원이, 사교육이 있습니다.
저는 내방하신 학부모님들께, 자녀를 믿으셔라, 라고 말씀드립니다.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오신 모든 부모님께서, 결국 아이들이 학습에 능동적으로 임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계시면서도, 그래도 무언가 자녀에게 선제적으로 처방하길 원하시는 것이죠.
선제적으로 처방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결국 아이들의 동기를 자극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부모의 처방 아래 놓인 아이들 중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성공하는데에는 부모의 선제적 처방이 가장 중요한 작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됩니다. 너무 많은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똑같은 선제적 처방을 겪으면서 그 중 얼마나 많은 숫자가 그 처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그러다가 결국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도 겁에 질려 그 처방이 의미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라도 부여잡은 채 10대를 보내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몇몇 성공 케이스에 현혹된 나머지, 많은 학부모님들은 똑같은 처방에 자신의 아이들을 그저 내어맡기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가는 그 길에서 '성공'하는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면, 다른 길을 걸어보겠다는 학부모님과 아이들의 결심도 필요할텐데, 많은 학부모님들은 일단 그 길로 아이들을 내어맡겨버리고 아이들도 그 길을 벗어나기에는 너무 겁이나서 그저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처방은 항상 문제 상황이 발생한 이후에라야 가장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 상황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동기 부여를 고취한 후, 일껏 해 보다가 맞닥뜨리는 문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가 스스로 동기 부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너무나도 확고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슬픈 일입니다.
자녀를 가장 믿고 응원해야 할 부모가, 자기 자녀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스스로 달려갈 것이라고 믿지 못하시고는, 먼저 선제적인 처방을 가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땅에 사는 너무 많은 청소년들이 '사춘기'라는 어른들의 낙인 아래 놓여 문제를 가진 것처럼 취급받는 것이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저는 결국 학원에 다니겠다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겠다고 하는 이야기도 아이의 입에서 먼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결국 아이가 스스로의 동기로 움직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는 일이 부모의 몫이라고 저는 생각하면서, 학부모 상담 때 이런 말씀들을 드립니다.
물으시는 학부모님도 계십니다. 아이가 스스로 동기 부여를 통해 달려가기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말입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제가 수능을 서른 셋에 보고 서른 넷에 교대에 들어가서 서른 여덟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부모님, 제가 늦었다고 생각하세요?
남의 이야기라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학부모님께서는, 서른 여덟에라도 교사가 되셨으니 성공하신 것이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말씀드립니다.
아마 자제분께서는 서른 네 살 전에는 무언가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할겁니다. 그럼 한숨 푹 쉬십니다. 참 재미나지 않습니까? 서른 넷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대한 열정 없이 살아가는 분들도 참 많은데, 만약 내 아이가, 서른 넷에 스스로의 동기를 통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학부모님의 자녀를, 믿으셔야 합니다.
아이들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살아낼 세상의 모습이 그렇게 바뀌기에는 아직 조금 요원한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우선 제 아이들이라도 믿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자녀를 믿기로 하신 학부모님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에서 아이들과 배움을 향한 열정을 불태워 볼 생각입니다.
다른게 없습니다. 재미있게 즐겁게, 스스로 배움을 향해 움직이면서,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으로. 결국 교사가 더 많이 노력하고 애써서 아이들의 배움을 위한 마중물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학부모님께,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과 함께 배우겠다고 다짐하는 일주일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