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로운 문화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
본론: 부는 여유를 만든다
6학년 1학기 사회의 첫 성취기준인,
[6사04-01]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와 서민 문화의 발달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의 변화 모습을 탐색한다.
을 토대로, 학생들은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의 배경으로 조선 사회의 경제적 변화 및 명나라의 멸망으로 인한 예학이 강화되는 현상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영·정조의 개혁 정치가 왕권 강화를 목적하였음을 탕평책·신해통공·문체반정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왕권 강화가 조선 사회가 안게된 문제와 모순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이러한 영·정조의 집권 전후로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변화가 영·정조의 개혁 정치 때문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영·정조의 통치 자체는 사회 변화의 적극성과 능동성을 불러 일으켰다는 평가는 가능할 듯 합니다.
키워드: 경제적 변화가 불러온 사회적 변화
대동법과 균역법이 가지고 온 경제적 변화는 사회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대동법은 공납을 실물화폐인 쌀로, 균역법(1756)은 군역과 요역을 실물화폐인 포로 받은, 세제의 개혁입니다. 대동법이 물건의 거래와 시장 시스템의 확산을 가지고 왔다면, 균역법은 임금노동자 계층, 즉 월급쟁이의 확대를 가지고 옵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농민이 직접 농한기에 군역을 수행하거나 요역을 수행하였습니다. 요역은 쉽게 말하자면 국가적 토목 공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기록이 남아있지만, 한양도성의 성곽 축성은 농사가 끝난 겨울철에 각 지역에서 농민을 불러 올린 후 농번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관청을 보수한다거나, 궁궐을 짓는다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농민들을 직접 불러들여 공사를 수행한 것이죠.
그런데 그것 대신 이제 면포를 받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는, 임금을 주고 노동자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에도 더 이상 농사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츰 생겨나긴 했습니다만, 균역법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자 계층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대동법이 불러온 경제적 변화는 사농공상으로 일컬어지던 사회적 계층의 층위를 변화시키면서, 점차 임금 노동자 계층이 사회적 계층의 한 층위를 이루게 되는 사회적 변화의 모습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과용 도서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중인 계층의 성장도 무시할 수 없는 현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중인 계층은, 유교적 질서 아래에서 양반 계층보다 낮은 신분이 이룬 사회적 계층입니다. 이들 중인들은 당시 성리학 질서 아래에서는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성리학은 우주적 이치 아래에서 예와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런 질서 아래에서 법률, 의학, 회계, 통역 등의 일은 예와 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양반이 이와 같은 일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들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중인들이 이런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중인들이 담당하던 일이, 지금으로 치면 고소득 전문직이 된 것을 생각하면 사회 변화는 참 아이러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던 중인들이었기 때문에, 사회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경제 시스템이 예민하게 변화하는 순간, 중인들은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이것이 중인들의 부가 축적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한 편으로는, 청나라 사신으로 동행하던 중인 계층의 실무진들은 상대적으로 성리학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므로 - 또는 그런 성리학 이념에 대한 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 청나라의 여러 새로운 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덜 가지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중인 계층의 부가 축적되면서, 당시 중인 계층이 거주하던 서울 서촌 일대에서는 시사가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서로 집을 옮겨 가면서 시를 짓고 이를 즐기고 누리면서 덤으로 소소한 파티까지. 그러다가 정기적으로 시 품평회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선발된 시는 한양 도성 안에서 두루두루 회람되었다고 하니...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중인 계층의 시사는 양반 계층이 향유하던 한문 시 문학이 중인 계층까지 확대된 것이니 새로울 것이야 덜 하겠지만, 당시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더 큰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무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계층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였을 때, 이를 통해 야기된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는 능히 짐작할 만 합니다.
키워드: 사회적 변화와 함께 찾아온 여가의 향유
중인 계층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사회적 변화는 삶의 큰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삶의 여유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모두가 농사를 지을 때는 하루가 단조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서로가 누릴 수 있는 여가 생활의 모습도 더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공연 문화의 발달은 그 중 가장 주목할만 합니다. 여러 산대 놀이의 등장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오일장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선과 선이 연결되는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이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유희들도 선보이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민화의 형태로 확산되기 시작한 회화나 사설시조의 형식으로 향유되기 시작한 문학의 모습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기 시작한 여가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글 소설이 더 넓게 퍼져가고 판소리 열 두 마당이 채록된 것도 이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기 시작한 여가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건의 거래는 시장을 형성하고, 시장의 형성은 새로운 거래물품을 만들기 시작하며, 새로운 거래물품은 이를 생산·유통하는 계층을 형성하며, 이러한 생산·유통 계층은 시장 자본을 집적한 사람들에 의해 더 크게 확대되어가기 시작하는 것. 꼭 15~16세기 유럽의 상업 자본주의 형성의 모습과 대비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가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는 모습은 교과용 도서에서도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으니 더 보탤 것이 없지만, 단원 김홍도 선생의 풍속화에 대해서는 첨언하고자 합니다. 김홍도 선생의 다양한 풍속화는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귀중한 자료요, 김홍도라는 브랜드를 더 빛나게 하는 그림들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던 것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시장을 통한 유통이 이루어져야겠지요. 당시 김홍도 선생의 작품이 시장에서 거래되던 작품인가 생각해보면,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들이겠지만, 그 작품의 향유 계층은 양반들이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김홍도 선생의 그림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교실에서 활용되어야지, 그것이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 예시로 안내되는 것은, 꼭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을 그와 같이 소개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혜원 신윤복 선생이나 오원 장승업 선생의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던 작품들로 소개할 만 하다는 생각을 더불어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