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정조 시기의 개혁정치 3
본론. 무엇을 위한 개혁 정치인가
6학년 1학기 사회 첫 머리에서 학생들은 아래 성취기준,
[6사04-01]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와 서민 문화의 발달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의 변화 모습을 탐색한다.
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선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에 대해 학습합니다. 그 전 단계로 먼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에 맞이한 경제적 변화의 원인과 추이를 알아볼 필요가 있으며,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에 강력한 예와 의에 대한 요구들이 사회 전반을 경직시키는 현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교과용 도서에 나오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 지점을 다루지 않으면 영·정조의 개혁 정치가 목표로 하는 바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두 글에서 조선 사회의 경제적 변화 및 소중화주의를 부르짖는 유학자들에 의해 사회가예와 의로 경직되는 모습을 두드려 보았습니다. 이제 영·정조의 개혁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키워드: 탕탕평평, 탕평책
예와 의의 정치는 붕당에 맞물려 정치를 경직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예송논쟁은 가만 살펴보면 그 대립을 이해할만도 합니다. 돌아가신 효종 임금을 왕의 예로 모셔야 하는가 사대부의 예로 모셔야 하는가는 유교가 세계를 바라보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문제라서 굉장히 중요하고 또 의미있는 논의였다고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에 걸친 환국 정국쯤 오면 이제는 문제가 있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관성으로 싸우고 감정으로 싸우는 수준이 되어버리는 듯 합니다.
그리고 경종 임금과 영조 임금의 즉위 쯤에 오면 그 감정이 왕의 정통성에 옮겨 붙는 모양새가 됩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 무수리(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 그리고 음모론 짙게 드리울만한 급작스런 경종의 붕어. 신하들은 이제 관성과 감정을 바닥에 잔뜩 담아둔 채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다투게 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맞물려 계속되는 음모론이 떠도는 바람에 영조 임금은 굉장히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당시의 노회하고 집요한 모습은 갖지 못했던 젊은 시절에, 영조는 결국 탕평책을 꺼내어 듭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조정자로서의 임금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국의 극렬한 대립에 맞서 영조는 끊임없이 조정하고 중재하고 의견을 묻는 모습을 보입니다. 때로는 노론의 편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소론의 편에 서기도 하면서 무엇이 의리인지 끊임없이 되묻고 수정하며 그렇게 오십 이 년 간의 재위를 보냅니다. 사도세자를 그렇게 비명에 보낸 것도, 영조의 외로운 처지를 보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비록 비정함을 용납할 수 없을 지라도.
그런데, 정조 임금은 여러 학자들의 말대로 서양의 계몽 군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혹은 플라톤이 말하던 철인 군주에 가깝기도 한 듯 합니다. 정조 임금은 조정의 모습보다는 다양한 논란의 앞에 당당하게 서서 이를 이끌어가는 주도자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왕의 권위, 그것을 앞세워 신하들의 부모로써 신하들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알려주며 채찍질하는 왕의 모습. 유명한 일화로, 왕이 신하들에게 한 수 배우던 경연 자리를, 정조 임금은 왕이 신하들에게 가르치는 자리로 바꾸었다고 하죠.
결국 신하들의 극렬한 대립에 따라 표류하는 정국을 조정하기 위해 펼쳐든 탕평책이,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붕당이나 학설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는 강력한 왕의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영조 임금 당시의 탕평책은 완론탕평, 정조 임금의 탕평책은 준론탕평이라고 후세의 학자들은 구분하는 듯 합니다.
탕평책은, 붕당의 대립을 완화시켜 왕의 통치가 조금 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통치 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키워드: 신해통공
영·정조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개인적으로는 신해통공을 꼽고 싶습니다. 시장의 자유. 시전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의 철폐.
조선 전기에는 상업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종로 바닥에 시전이 있었지만, 그들은 공납으로 충당할 수 없는 왕실의 물건을 주로 다루었을 뿐입니다. 전근대적인 물물교환의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는 시전도 그 정도의 역할만을 해 나갔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공인을 통해서 정부에서 직접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공인들은 쌀을 들고 전국에서 왕실의 물건을 사들이게 되고, 쌀은 곧 화폐로 대체됩니다. 화폐가 거래의 수단으로 급속도로 자리잡으면서 물물교환의 경제 시스템은 빠르게 화폐 경제로 바뀝니다.
돈이 돌면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법이라, 작은 장사에서 머물지 않고 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사회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시전 상인들에게는 달갑지 않습니다. 조선 전기의 물물교환 경제 시스템에서는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이 명목을 넘어서지 못하였기 때문에 별 의미 없는 것이었지만, 조선 후기의 화폐 경제 시스템이 자리잡으면서 시전 상인들은 독점권을 통해 자신들의 부를 더하기를 꾀하게 됩니다. 본격적을 시전 상인들과 사상들이 대립합니다.
정부는 한결같이 시전 상인들의 편을 듭니다. 항상 법은 사회의 변화를 가장 늦게 따라가게 되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금난전권)은 18세기가 저물 때까지 정부에 의해 수호됩니다. 그러다가 정조 임금 대에 이르러 이러한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이 신해통공에 의해 깨어지게 됩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사농공상의 유교적 질서가 흔들거릴 기회가 왔습니다. 물론 이런 사회 변화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은 중인 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전문직종에 종사하였지만, 학문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어서 홀대받던 사람들이, 사회 신분 질서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자 자신들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급격하게 사회 주류로의 편입을 꾀합니다. 교과용 도서에서는 그저 평민으로 뭉뚱그리지만, 한양 도성에서부터 이러한 변화가 이제는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고착되기 시작합니다.
키워드: 문체반정
그런데, 신하들의 대립을 조정하거나 주도하는 방식으로 정치하고, 사회의 신분 질서를 강력하게 흔들게 되는 정책을 펴는 그 이면을 설명하는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입니다.
문체반정은, 정조 임금이 연암 박지원의 문체를 가지고 시비를 건 사건입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쓴, 당시 실학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재기발랄한 유학자였습니다. '호질'과 '허생전'을 현재의 중등 교육과정에서도 반드시 배울만큼, 그 통찰이나 영향력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 임금은 그 박지원의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딴 패관잡기의 문장을 그만두고 순정한 문장으로 돌아가라며 단속하고 검열한 사건입니다. 결국 박지원은 정조 임금에게 다시는 이런 식의 문장을 구사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용서 받습니다.
이해가 조악하지만, 박지원 선생은 지금 식으로 치면 재기발랄한 인터넷 식의 문체를 쓴 셈이고, 정조 임금은 바른말 고운말을 쓰라고 꾸짖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조 임금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강력한 유교적 질서에 따라 나라를 청신하게 만들어가고자 하는 절대 군주의 의지. 생동감있게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이 유교적 사상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계몽 군주의 정책 방향. 문체반정에 의해 참신함을 내세우던 다양한 글들이 다시 유교적 틀 안에 갇혀버렸다는 식의 문학적 의미만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정조 임금이 꿈꾸던 나라는 강력한 유교적 예와 의가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 펼쳐지는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키워드: 그래서 왕권 강화, 그러나
1783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선거를 통하여 국가 지도자를 뽑는 정치체제를 만듭니다. 그런데 조선은 1792년, 문체반정을 통하여 절대군주가 문장까지 지적하고 검사하는 사회를 목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조 임금과 정조 임금은 사회가 처한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영조 임금의 균역법은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등장시켰고, 정조 임금의 신해통공은 이제 장사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혁이 향하는 방향은 모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쯤에서 우리는, 영·정조의 개혁 정치가 향하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권 강화가 당대의 정치 철학으로는 유일한 사회 발전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적 해석은 현재를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왕권 강화를 위한 영·정조 임금의 다양한 시도를 전근대적이라고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냉정한 평가까지 막지는 말아야 합니다.
정조 임금은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기 위해서 친위 그룹을 형성합니다. 일단이 규장각의 선비들이요, 다른 일단이 외척 세력이었습니다. 왕권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신하들을 도처에 뿌려둔 것이죠. 왕이 한 마디 하면, 동의요, 제청이요, 외쳐줄 수 있는 사람들. 그런데 왕이 사라지고 그들이 왕의 권위를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세도정치의 시작이, 정조의 사돈이었던 김조순 부터임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조 자신이 살아있었다면 강력한 왕권의 손과 발이 되었을 사람들이, 정조 사후에 비대해진 손과 발을 자신들을 위해 휘두르기 시작하였을 때, 세도정치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왕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애썼고, 신하들도 자신의 영지를 위해 애썼습니다. 왕권의 강화와 세도정치는 이렇게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0여년 뒤에, 세도정치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선택한 방법도 왕권 강화임을 본다면, 결국 영·정조의 왕권 강화책은 조선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불가피함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것이 영·정조 시대의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평가하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