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정조 시기의 개혁정치 2
필요한 배경지식 2. 병자호란 이후 예학의 강화
6학년 1학기 사회 첫 머리에서 학생들은 아래 성취기준,
[6사04-01]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와 서민 문화의 발달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의 변화 모습을 탐색한다.
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선 영·정조 시기의 개혁 정치에 대해 학습합니다. 그 전 단계로 먼저 학생들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에 맞이한 경제적 변화의 원인과 추이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배워 보았습니다. 물론 교과용 도서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배경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필요한 배경 설명은 바로 병자호란 이후 강력한 예와 의가 작동하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키워드: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
명나라는 병자호란(1636)이 조선 땅을 휩쓸고 지나간 몇 년 후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합니다(1644). 그러나 그 멸망에 청나라가 큰 기여를 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바로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나라의 멸망에 조선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명나라 멸망의 외부적 원인으로 꼽는 것이 바로 명나라의 임진왜란 참전입니다. 여진족을 억누르던 만주 주둔군 5만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참전하였고, 물적 손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을 견제하지 못해 그들이 세력을 뻗칠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력을 합치고 - 부족의 연합·통합 - 키워가던 여진족은 어느덧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게 되었고, 호시탐탐 중국 본토를 노리면서 배후 세력이 될만한 우리나라를 견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입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강력한 반 청나라 - 배금 - 정책을 편 것을 인조반정과 연결지어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1623년, 광해군은 폐모살제 -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하고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귀양보낸 후 사사(방에 가두어두고 아궁이에 불을 아주 뜨겁게 지펴 태워 죽인)한 - 를 명분으로 일어난 인조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인조 임금이 성리학적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시선이고, 이는 일리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청나라(후금)의 침입.
정묘호란의 침입은 어찌어찌 넘겼지만 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항복 절차를 겪으면서, 조선 정치계는 소용돌이로 빠져듭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200년을 넘게 통치해 온 조선 사대부들에게 청나라는 그저 예와 의를 모르는 오랑캐일 뿐이었습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을 경략하며 그들을 다스리기까지 하였는데... 어느덧 그들에게 군신의 예의를 다하는 항복 의식을 치루었으니 그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뒤이은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중국 본토 점령.
이제 성리학 질서 아래에서 예와 의를 지키고 받들 나라는 조선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인식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반 속국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강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중화사상을 수호하던 명나라는 땅 위에서 사라지고, 중화사상의 근본이요 기반인 중국 본토는 오랑캐들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키워드: 소중화사상과 예학의 강화
명나라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중화사상을 수호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조선은 중화사상을 가꾸고 지키며 이 땅에서라도 예와 의가 꾸준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식자층 사이에서 넓게 퍼져가게 된 것입니다.
성리학에 대해 범자들이 논의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야 조선 왕조가 성리학을 부여잡고 있다가 일제에 불법적으로 침탈당하는 비극을 겪었으니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팽배하지만, 조선 왕조가 500년을 넘게 지탱해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민주적 가치에 근거한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으로 갈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유지되고 있으며, 이렇게 된 것이 채 백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결국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의한 조선왕조의 흥망을 한 쪽 측면만을 강조하여 보기에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고, 아마 당시를 살았던 식자층에게는 더욱더 어려운 것이었을테죠. 어쨌든.
중화사상의 가치를 지켜야한다는 것이 조선 정치 전반에 흐르는 인식이었고 이것은 예학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드러납니다. 현종 연간에 있었던 예송논쟁을 거쳐 숙종 때 줄기차게 일어났던 환국 정치는 이것의 현상입니다.
붕당은 예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다투었고, 옳은 것(의)을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딪쳤습니다.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해석하는 측면에서, 효종비가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은 당대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구에게 명분이 있는가.
명분을 갖기 위해 더 강력한 예법이 조선 사회 전반의 작동 기제가 됩니다. 남여차별이나 장자상속 등은 이러한 예법이 강조되는 현상으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정신 없는 제도로 남아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합니다.
예와 의를 수호하는 소중화주의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옳음을 다투는 붕당 정치 아래에서 다양함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넉넉한 마음들이 설 곳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양명학자들이 기를 펼 수 없었던 것이나, 서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기술과 정신이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조선 사회가 가졌던 문제라고 섣불리 판결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붕괴되고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아가던 시절에 서구 유럽에서 보여주었던 강력한 반동적 흐름과 그에 반발하는 세력이 충돌하였을 때 벌어졌던 그 혼란을 생각하자면, 조선 사회를 유지하였던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그저 쓸데없는 것으로 매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극복하였으면 좋았겠지만... 하필이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울 뿐.
임진왜란 이후 상업적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병자호란 이후 사회를 예와 의의 엄격함 속에 가두어 둔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토대로 영·정조 시대의 개혁 정치를 이해할 준비를 이제 마쳤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