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談] 2. 홀로, 탑
#1. 유랑하는 탑
지금은 좋은 곳에 잘 모신 탑,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 86호)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경천사는 개경에 세워진 고려시대 절이라고 합니다. 그 경천사에 세워졌던 탑이 바로 경천사지 10층 석탑입니다.
그런데, 경천사지, 라는 명칭을 쓰는 것을 보니 아마도 어느 시절엔가 절집이 없어진 듯 합니다. 현존하는 절에 '지'라는 사족을 붙이진않으니까요. 그래서 경천사지, 혹은 경천사터의 10층 석탑은 아마도 어느 순간부터 홀로 남겨져 있었을 겁니다. 이걸 일본인이 자기네 나라로 내어갔습니다. 아직 대한제국 시절이던 때, 이 탑을 몽땅 들어내어 일본 가는 배로 실어 가 버린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총독부 시절 일본 총독 주도로 다시 찾아와서는,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지 못하고 경복궁 앞마당에 두었습니다.
1989년 초로 기억하는데, 친구들과 함께 경복궁을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에는 근정전이 유일하게 중층을 이루고 있는 바 보이는 건물은 근정전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인왕산이 분명하니, 아마 지금으로 치면 건춘문 뒤쪽으로 탑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탑의 신세가 참 처량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을 수 없는 신세... 그래도 아쉬운대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잘 보호받으면서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불탑의 모양은 굉장히 다이나믹한 변화를 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하대를 지나면서 석가탑을 정점으로 조금씩 정형미를 탈피하기 시작하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면 독창적인 해석을 통하여 다양한 탑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경천사지 10층 석탑 정도에 이르면 그저 보면 볼수록 놀랍다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그래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다른 것은 안 보더라도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꼭 둘러보고 옵니다. 찬찬히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참 신비하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라 산성비에 취약한 덕에 이렇게 실내에 두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40년 전만 하더라도 바깥에서도 끄떡 없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오염을 피해 있어야 하니... 푸른 하늘 맑은 바람 맞이하며 있어야 할 탑이, 타향살이도 서러운데 이렇게 갇혀 지내야하는 신세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집 떠나 정처없는 공간을 차지하고 앉은 탑이, 국립경주박물관 뒤켠에 하나 더 있습니다. 고선사지 3층 석탑(국보 제 38호)입니다.
고선사지 3층 석탑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홀로나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댐이 생기면서 있던 절터가 수몰되게 되었고, 덕택에 정든 자리를 떠나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그것도 제일 안쪽에 쓸쓸한 자태로 서 있습니다.
백제식 탑과 신라식 탑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고선사지 3층 석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둘 다 목탑을 계승하였음에도 아무래도 신라가 조금 더 오랜 영향력을 끼쳤기에 신라의 3층 석탑이 이후 시대의 대세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그 날렵한 모습이, 신라의 여러 3층 석탑의 단단한 모습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계승하는 탑이 흔치는 않습니다.
고선사지 3층 석탑은 그 단단함이 과한 나머지, 중후하다 못해 그저 주저앉아버린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미감을 어떻게 변화해가는지에 대한 시원격의 탑인지라, 다른 탑을 둘러보기 전 한 번 쯤 살펴볼 만한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박물관 제일 구석, 다른 여러 폐사지에서 나온 석재 부재들을 바닥에 주욱 늘어놓은 한 켠에 자리잡은 탓에, 그 쓸쓸함이 너무나도 커 보입니다. 심지어는 돌아갈 기회 마저도 없는 탑이니... 통일이 되면 찾아갈 곳이라도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신세가 더 나아보입니다.
#2. 홀로 남은 탑
사찰에서 탑이 차지하는 위상은 실은 어마어마합니다. 보통, 부처님의 모습과 생각을 드러내는 여러 알레고리가 불상에 있다보니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부처님 자신이 머무는 곳은 바로 탑입니다. 탑의 기원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한 것이니까요. 진신사리와 관련해서,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되었던, 진신사리를 모신 유리병이 깨어진 이야기가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문화재 발굴 역사를 통틀어 무령왕릉 발굴 이야기와 더불어 안타까운 한 획을 긋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 절은 없어져도 - 폐사지 - 탑은 오롯이 남아 부처님의 자비가 깃든 곳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보원사지입니다.
충남 서산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만나고 와야할 분이 바로 '백제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서산 마애삼존불입상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만나보러 가셨다면,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서서 보원사지 5층 석탑(보물 제 104호)을 만나셔도 좋습니다. 혹은, 용현자연휴양림에 방문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볼 수도 있습니다.
보원사지의 당간지주를 마주하고 섰을 때 딱 드는 생각은, 이렇게 외진 곳에 어떻게 이런 규모의 절집이 가능한 것인가입니다. 게다가 보원사지는 사찰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당간지주를 지나 작은 내를 건너면 부처님의 이상이 이루어진 장소, 사찰로 진입하게 되고, 낮은 계단을 올라 기단을 높인 곳에 올라서면, 주춧돌과 함께 오롯이 홀로 우뚝선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람터 뒤편으로는 부도 -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 - 를, 당간지주를 지나서는 석조 - 돌로 된 큰 물통 - 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간혹 자연휴양림 올라가는 차 이외에는 기척 없이 고요하고 고즈넉한 보원사터. 한참을 둘러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옛 영화가 스러진 후에 처연하게 남아있는 이 쓸쓸함이 얼마나 반가왔던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있는 것의 흔적이라고는 날벌레 밖에는 만날 길이 없는 이 외진 곳에도, 불교의 위세는 실로 굉장하여 어마어마한 가람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죠. 이 곳의 모든 역사를 처음부터 보아왔을 탑, 보원사지 5층 석탑에서 느끼는 감흥은 그런 것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형적인 백제계의 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보다 조금 더 안정감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바, 고려시대의 탑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보시는 듯 합니다.
홀로된 탑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양양의 진전사지 3층 석탑(국보 제 122호)입니다.
저희가 갔을 때는 발굴조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 탓에 찬찬히 둘러보기가 어려웠던 기억도 있고, 워낙 오랜 절터였던 덕에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국보급인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참 잘 되었습니다.
속초에서 출발해서 한 30분 정도 산 속으로 들어갔던 듯 싶습니다. 예전에는 길도 비포장이고 외져서 훨씬 더 가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길이 좋아져서 가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탑 하나 보려고 30분을 갔다가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왕에 찾았을 때, 오래도록 머무를만한 어떤 계기가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쨍쨍한 낮을 피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왕에 폐사지를 찾으려고 마음 먹는다면, 해질녘이 참 좋아 보입니다. 지는 해를 고스란히 맞이하는 탑신, 이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 참 좋은데... 해가 너무 쨍쨍하니 무언가 고즈넉한 느낌은 덜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감은사지는 햇볕 쨍쨍한 날 찾아도 그저 좋기만 하였습니다.
감포가는 길 끄트머리에서 만날 수 있는 언덕 위 쌍탑, 감은사지 3층 석탑(국보 제 112호). 문무수중왕릉과 한데 묶여 신라 불교의 호국불교로써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유적인 감은사지. 이제 신라를 왜구로부터 지키겠다는 감은사는 허물어져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여전히 한 쌍을 이루어 쓸쓸함을 조금은 덜어 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것보다는 정면 언덕배기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게 더 낫습니다. 아마 가람이 처음 갖추어질 때도 그렇게 진입하도록 길이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찰을 두르는 담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 한 가운데에 천왕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언덕배기를 올라가면서 담장 너머로 머리 꼭대기부터 점점 드러나는 두 쌍탑의 모습. 아마 이 탑들의 배치는 그렇게 부처님의 위엄을 만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탑이 얼마나 안온한지 모릅니다. 고선사지 3층 석탑과 그 모양이 흡사한데도 불구하고, 아마 제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짝과 함께 있기에, 쓸쓸함보다는 따뜻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무수중왕릉에는 갈 때마다 느끼지만, 가도 뭐 별 다른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러나 감은사지에서는, 보일듯 말 듯 감포 앞바다 쪽을 바라보는 기분도 참 좋고, 이렇게 서서 두 탑을 한 눈에 보다가, 한 탑을 두 눈에 보다가 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8월의 한 더위에 가서는 한참을 빙글빙글거리다가 온 기억이 있습니다. 뒤편에 놓인 주춧돌을 보면서 가람의 모양새를 짐작해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3. 자리 잃은 탑
안동 신세동의 법흥사지 7층 전탑(국보 제 16호)을 찾은 것은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절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탑 한 쪽 옆에는 집이 있고, 다른 한 쪽 옆에는 철길이 있습니다. 가만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멀리서 쇳소리가 들립니다. 기차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입니다.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 그렇게 기차가 탑의 옆을 지나가고 다시 고요가 찾아올 때의 탑은... 이 거대함 만큼이나 슬프로 외로와 보입니다.
전탑은 벽돌을 쌓아 올린 탑을 일컫습니다.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전탑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지만, 조금 후 석탑으로 확 쏠려버리게 되고, 전탑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드는 구조상, 아무래도 충격에 약한 것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전탑은 다 안동 인근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안동 쪽의 지반이 굉장히 안정적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기도 하나 봅니다.
안동 쪽의 가장 유명한 전탑은 동부동 5층 전탑(보물 제 56호)입니다. 유명한 이유는, 안동역 바로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기가 쉽습니다. 안동역에 주차하고 둘러보면 되니까요. 동부동 전탑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기로 하고.
기왕에 전탑 얘기를 꺼낸 김에, 한 5년 전, 안동이 고향이었던 옆반 선생님이 고향에서 결혼식을 할 때 참석했더랬습니다. 결혼식에 가는 길에, 기왕에 먼 길 간 김에 안동 지역의 전탑을 빙 둘러봐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전탑은 안동'이라는 명제는 서울 촌놈에게는 큰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촌놈은 지방의 거리감이 서울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잘 모른 덕택이죠. 안동 시내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 가장 먼저 조탑동 5층 전탑을 보러갈 생각으로 출발하면서, 조탑동까지 30여분 정도 걸린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먼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탑동 5층 전탑이 보수공사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살짝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투명 가림판 사이로 탑구경을 하게 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이 조탑동은 권정생 선생님께서 나셔서 사시다 돌아가신 곳이었기 때문에 권정생 선생님 생가를 둘러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운대로 조탑동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이번에는 의성 탑리 5층 전탑을 보러 출발했습니다. 조탑동에서 탑리까지도 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 그런데...
여기도 보수공사... (쿨럭쿨럭) 흐릿한 전탑의 실루엣만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다가 그냥 왔습니다. 전탑 순례는 실패!
근처의 빙산사지 5층 석탑(보물 제 327호)만 보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결국 제가 제대로 만난 전탑은 신세동 법흥사지 7층 전탑과 동부동 5층 전탑 뿐이지만... 그러나, 법흥사지 7층 전탑은 지금도 찾았던 당시를 생각하면 그 쓸쓸함이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해질녘에 도착해서 해가 완전히 진 후에까지 한참을 그 앞에서 꼼짝을 못했던 듯 합니다. 한 바퀴 돌고는, 어후, 한숨 한 번 쉬고, 한숨 한 번 쉬고는, 탑신을 올려다보며, 으아, 한숨 섞인 소리 한 번 내쉬고, 그렇게 또 한 바퀴 돌아보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예쁘고 단아한 탑들의 모양을 벗어난, 거대한 서글픔이 참 크게도 느껴졌던 듯 합니다.
황복사지 3층 석탑(국보 제 37호)도 실은 자기 자리를 잃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길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데, 길 다른 한 켠은 언덕배기입니다. 방향은 진평왕릉 쪽인데, 그렇다면 가람 배치가 모호합니다. 분명히 길에 가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언덕배기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앞쪽은 들판. 황복사는 어디에 있었으며, 이 황복사의 3층 석탑은 가람을 어쩌고는 홀로 이 곳에서 진평왕릉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황복사는 신라 제 32대 효소왕이 선왕인 신문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워낙 모호해서... 진평왕릉으로 비정된 왕릉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위치라서 모호함은 더 커져 갑니다. 진짜 진평왕릉인가? 진짜 황복사 터인가? 진실은 황복사지 3층 석탑만 알고 있겠지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야말로 완전하게 자리를 잃은 모양새입니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는 지금 탑골공원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조선 세조 임금 당시에 창건되었던 원각사는, 아무리 임금이 지은 절이지만 조선 시대의 불교 억제 정책 때문에 조금씩 그 위세를 잃어갔습니다. 지금은 원각사의 10층 석탑만을 그 흔적으로 남긴 채 이름도 잃어버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리 상자에 갇혀 있는 모양새라니... 경천사지 10층 석탑보다 못한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지언정, 자신을 찾아온 객들과 한 마디 말도 뒤섞을 수 없는 이 박제된 신세라뇨. 그저 서글퍼 보일 뿐입니다.
#4. 이름 잃은 탑
그러나, 신세가 가장 서글픈 탑은 이름도 잃어버린 탑입니다.
장항리 5층 석탑(국보 제 236호)은, 원래 속한 가람의 이름도 잃어버린 것이 된지라, 그 이름도 마을 이름이 붙은 탑입니다. 가기도 얼마나 험난한지... 한참을 산길 따라 가보니, 이렇게 외진 곳이 또 없을만큼 외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참 좋았습니다. 이름도 잃어버린 탑인데, 어찌나 이렇게 외진 곳에 꽁꽁거리며 숨었는지...
신세 서글픈 일은 또 하나 있습니다. 원래는 탑이 한 쌍입니다. 그런데 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엄구를 훔쳐가기 위해 탑 하나를 일제 시대에 폭파했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이죠. 그래서 멀쩡하지 않은 탑 옆에 몸통 잃은 탑이 하나 더 서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이름도, 벗도 잃어버린 쓸쓸한 모습.
폐사지를 어떤 분들은 망한 절집이라고 자조적으로 일컫는 듯 합니다. 불교를 비하하는 말이겠습니까.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겪었던 부침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지금이야 그 위세를 떨치며 흥왕하는 사찰들도 있지만, 어디엔가 다니다보면 그저 외로이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는 불탑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품을 팔아 자꾸 다니게 되는 듯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