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個讀者, 獨立書店] 사랑방
어릴 적엔 동네 대형몰의, 지금으로 치면 중형 서점에서 주로 책을 사곤 하였습니다. 몰 2층에 자리잡고 있던 중형 서점. 어린 나이에도 그 많던 책들이 어찌나 풍성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다니던 대학 앞에는 사회과학서점이 있었습니다. 정문을 나와서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경의선이 지나가는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가면 나오던 서점.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과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하면서, 그 서점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 책도 좀 사 보도록 하는 미션도 함께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중형 서점도, 사회과학서점도, 모두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도서 유통 생태계의 큰 몫을 차지하는 가운데, 흔히 이야기하는 동네 서점은, 특히 제가 사는 도시에서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교보문고에서 시작한, 책 읽는 공간이 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파는 곳에서, 책을 읽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꽤나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나 봅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그 책을 사던 서점들에는, 마음 편하게 책을 살펴볼 공간은 없었습니다. 서가에 기대어 책을 보거나, 아니면 서가와 서가 사이의 좁은 공간에 바짝 무릎을 세우고 앉아 책을 보곤 하였지요. 그리고 책을 사도록 만드는 다양한 안내판 위의 문구들. 그 사이에서 교보문고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던 듯 싶습니다. 새롭게 런칭된 교보문고 지역점들에서도 책 읽는 자리는 공고하게 자리잡은 컨셉이 되었습니다.
한 편으론, 교보문고이기에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큰 자본은,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으니까요. 아마, 그런 시도를 하기 어려웠던 영세한 동네서점들에게는, 시대의 변화에 대한 서점의 변화를 모색하기에는, 너무 큰 모험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보문고의 시도는 여러 독립서점들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시대의 변화를 캐치한 운영자들이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는 것인지도.
이번 가을 제주도 독립서점에서의 놀라운 발견은, 이제 독립서점들이 사랑방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고산리 무명서점의 독서모임, 그리고 고산중학교 추천도서 전시 같은 기획들은, 독립서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도서(와 굿즈)를 유통하는 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 흐르는 생각을 예리하게 캐치하여 제시하거나(큐레이팅)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책방 소리소문은, 개점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다양한 기획 강연을 마련하여 관광객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모으는 역할도 하는 듯 합니다. 특히, 근처 주민들께서 관심 가지고 오신다는 답글을 게시글에 남기시는 것을 보면서, 도시에서 누릴 수 없는 문화적 기회가 제주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대앞 책방 풀무질이 영업권을 양도한다는 이야기가 크게 슬프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년 가을, 책방 풀무질에서 꽤 오랜 시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지하 계단 옆 유아를 위한 별실에서 저희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주셨던 사장님의 사모님 덕택이었습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이런 공간에 아이들 서넛이 함께 모여 어울릴 수 있다면, 더 즐거운 마음으로 서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아이들(과 와이프)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 곳이 가족의 문화 공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책방 풀무질은 저희가 사는 곳과는 꽤 먼 거리였고, 다음 발걸음을 쉽게 잇지 못한 상태에서, 영업권이 양수·양도 되었지요.
독자는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책은 소비되고 있고, 독서 행위는 필요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록 이북 형태의 도서가 유통되지만, 그것이 종이책의 수요를 현저하게 줄였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여전한 아날로그 방식의 상품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날로그 방식을 대표하는 행위는, '면대면'입니다.
어찌보면, 아날로그 방식의 운영을 고수하는 독립서점들이 지향해야 할 지점도, 아날로그적 행위 주체인 독자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삶과 생각과 가치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기회, 가능성, 공간을 열어가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