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12. 특별한 중심잡기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절대로 학습을 위한 학원 같은 것은 보내지 않아야지 생각한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교육 바운더리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백 오십여명 정도의 학생들을 개인 과외로 만나면서, 스스로 개인 과외를 선택한 케이스는 딱 한 경우였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은 개인 과외를 중단하는 선택도 스스로 했습니다. 이 정도면 배울 내용을 다 배웠다면서, 이제부터는 혼자 할 수 있다면서. 그 이외에는 모두, 타인의 선택 - 당연히 부모 - 에 의해 강요된 학습이었습니다.
그런 수동적인 학습이 불러오는 결과는 거의 한결같았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배움에 대한 성실함을 가진 친구들은 억지로라도 끌고 갈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인생을 그저 수동적으로, 한 번의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친구들은 이 시간이 그저 (관용적 의미로) 도살장에 끌려온 소 마냥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간혹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분들은 그런 친구들과는 그냥 놀아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제 아는 친구가, 제가 하던 과외를 이어받았는데, 매일 과외 학생이랑 앉아서 놀고, 그 엄마와는 같이 와인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구요. 예체능 수학 과외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데 저는 그걸 못해서,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 돈값을 한다고 지지고 볶으면서 문제를 풀어주고, 과제를 내 주고, 이를 확인하면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졸거나, 멍하거나, 모르거나, 울거나, 짜증부리거나.
학원에서 일할 때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학원은, 억지로 끌려온 학생들에게 숨통 정도는 열어둘 수 있었습니다. 시야가 분산되니까. 그래서 공부 곧잘 하는 친구들과는 강의 마친 후 사무실에서 같이 스타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얘네들도 부모에 의해 학원에 다니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부모에게 꽉 잡혀있을 때 잘 잡혀 있었던 덕에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관성으로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덕일 뿐. 관성이 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인 사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약간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학습지 가판대에서 군것질 거리와 제 아빠의 개인정보를 바꾼 후, 그렇게 '눈높이' 학원을 다니겠다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름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제 아이들 데리고 교육 박람회 같은 데 가면 둘째는 항상 '스마트쎈' 부스 같은 곳을 서성거리며 저걸 하고 싶다며 노래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했고, 절대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하겠다고 노래노래를 부르는데 그걸 막는 것은 또다른 의미에서의 부모의 강요가 아닐까 생각해서 결국 4학년 2학기 때에는 한 학기 조금 넘게 태블릿 학습을, 6학년 1학기부터는 그 해 12월까지 동네의 학습지 센터에, 다니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학습하고 다니면서 항상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말해라. 그래서 둘 다 반 년 조금 넘게 하다가 자의로 그만 두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였습니다. 할 이유가 없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저희 첫째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저희 둘째는 학습을 위한 학원에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배움을 위해 학원을 스스로 원할 때 보내겠다. 스스로의 필요를 부모가 먼저 떠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
물론, 고등학생이 되는 첫째는, 스스로 수학 공부를 하도록 간헐적으로 말하고 있긴 합니다. 제가 데리고 앉아서 주기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라도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지만, '오늘은 수학 공부 좀 했어?' 정도의 말만, 한 주에 3일 정도 묻는 듯 합니다. 제 엄마는 조금 더 자주 묻구요. 그나마도, 할 때마다 좀 마음에 걸립니다. 아이가 스스로 하려는 마음을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나마도 경계하게 됩니다.
학교에서는 좀 다릅니다. 저는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배움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편입니다. 올해는 특히, 제가 졸업시킨 학생의 동생도 담임하게 되었는데, 그 학부모님과 생각이 맞아 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래서 학부모님과 말씀 나눈 후에, 그 어린이에게 이렇게 저렇게 스스로 해 보라고 안내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에 한 번 정도, 간단하게 물으면서 지금은 어느 과정을 하고 있고, 어려운 것은 없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린이들도, 할 만한 어린이들에게는 학원에 먼저 발을 들이기보다는 스스로 해 볼 수 있도록 방법을 안내하고 왜 이렇게 하면 좋은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보아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아줄 뿐.
그럼에도 만약 학생들의 배움을 길잡아주고 안내해주어야 한다면, 저는 부모가 아닌 교사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서 제 아이들에게, 교사가 아닌 부모로서 아이들과 지내고 이야기나누고 함께하고 싶은 생각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교사로서도 그렇고, 부모로서도 그렇고,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경험도 하였고 이론적으로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이를 지속적으로 적용해가면, 제 학생들도, 제 자녀들도 모두 좋은 결과를 거두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교사 노릇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을까요? 아마 많은 교사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교실 밖에서 이미 너무 많은 시달림을 겪었기 때문에 교실에서는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녀들이, 학교에서 무기력하게 지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교사로서, 그런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속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집에서 제 아이들이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다가, 자신의 교실에서 지적 자극을 받고 배움에의 열망을 불러 일으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사들은 이와는 반대로 움직이는 듯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부적 되먹임을 강화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교사의 자녀는 학원도 보내지 말고, 과외도 시키지 말고, 그러다가 만약 다른 학생들에게 뒤떨어지면 어쩌라는 말이냐.
그러나 아마 이에 대한 답도 교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교실에서 만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학원을 다니고 그렇게 사교육을 한다고 다 월등한 수준에서 높은 성취를 보이던가요? 그런 학생도 있고, 아닌 학생도 있습니다. 사실 그런 학생보다 아닌 학생이 더 많습니다. 그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우리 아이만 안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이도 되짚어보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한다고해서 다 따라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취사하고 있는데, 자녀들에게만 스스로의 선택에 내어 맡기지 못한 채 그저 이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껏 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학부모가 가정에서 교사로써 자녀를 만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교사도 가정에서 교사로써 자녀를 만나는 일도 멈추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실에서의 교사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배움의 동기를 부여하고, 배움의 가치와 배움의 방법을 제시하고, 배움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안내하는 일. 이것은 교실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교사가 교실에서 교사로 살지 않고, 교사가 가정에서 부모로 살지 않을 때,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간혹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교단에 선생님 같은 분만 계신다면... 하지만 저는 특별한 교사도, 뭔가 대단한 교사도 아닙니다. 마침 오늘 다른 반 학부모 한 분과 다른 일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다가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작년에 제 학부모 특강을 듣고는 자녀가 꼭 저희 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반에 배정받았을 때 좀 아쉬웠는데, 올해는 6학년 모든 선생님들께서 너무 훌륭하신 덕택에 처음의 아쉬움이 금새 가셨고 지금은 모든 6학년 선생님들께서 애써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이다'. 요 근래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좋았던 말이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각자의 교사와 함께 지내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배움을 배운다는 것을, 학부모가 인정하는 것. 사실 교사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학부모님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간혹 학부모 상담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자녀의 공부는 내가 충분히 책임지고 있으니, 학교에서는 자녀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고 신나게 지냈으면 좋겠다. 부모가 교사에게 자신의 역할을 위임하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면, 자녀가 다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는 막상 자신이 어떻게 부모 역할을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아이들은 매년 부모 역할을 하는 교사가 바뀌니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고, 그런 것들이 누적되어 부모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가지고 오겠죠.
저희 부모님 세대는 자녀와의 관계를 가부장적으로 해결하려 들었기에 관계 단절의 어려움을 겪었다면, 저희 세대는 자녀를 '가르치려 들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 길 물 속은 아는데, 반 길 자녀 속도 모르겠다는 것, 많은 부모님들이 느끼면서도 외면하는 현실인 셈입니다.
어찌보면 저는 제 자녀의 인생을 앞에 두고, 요즘의 세태와는 다른 선택을 해보고 있는 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자녀 의 배움은 교사인 제가 책임질테니, 학부모님께서는 집에서 잘했다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사랑만 해주셔라'고 말하는 처지에서, 제가 제 집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교사로써 하는 말에, 부모로써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초등학생이 되는 저희 집 막내의 담임 선생님들을 신뢰할 생각입니다. 저희 첫째와 둘째의 담임 선생님들을 한결같이 신뢰하고자 노력하고 실천했던 것처럼, 저희 막내도 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부모로써, 제 자녀가 학교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바른 자세와 태도로 배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더 많이 인정하고 사랑해주고 격려하고 존중하는 부모가 되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