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11. 특별한 관계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참 꽉 막힌 성격의 소유자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칠판은 백묵을 사용했었고, 지금과는 다르게 칠판을 물로 닦아내거나 할 수는없었습니다. 불룩한 칠판 지우개로 칠판을 깨끗하게 닦은 후에는 이걸 칠판 털이개로 가지고 가서 탈탈탈 털어내야 했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5학년 2학기 때 제가 칠판 지움 당번이었습니다. 돌아가면서 하지도 않고 오롯이 한 학기 내내, 매 시간 닦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봄방학에 들어가기 전, 담임 선생님께서 굉장히 큰 칭찬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도 성실하게 당번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고, 그러시면서 교사용 문제집을 한 권 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물론 그 문제집을 들여다보진 않았지만요.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급 서기 역할을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학급일지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그것을 쓰도록 시키셨습니다. 매 시간 수업 내용을 한 줄로 적고, 조회 및 종례 내용을 꼼꼼하게 적고, 그러고는 매일 교무실에 가서 담임 선생님 싸인을 받았었습니다. 그걸 1년 내내 했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꽤나 좋아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꼼꼼하다며, 글씨도 점점 나아진다며.
한 번 정도는 빠질만도 한데, 쉬는 시간 종이 치면 한 눈 팔지 않고 칠판으로 달려나가 칠판 지우개를 집어들어 벅벅거리면서 칠판을 닦고는 탈탈탈 털어서 칠판 앞에 가져다 두곤 하였습니다. 학급일지도. 하루 쯤은 빼먹을 만도 한데, 그런 일 한 번 없어 꼼꼼하게 빈 칸 하나 없이 메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성격 덕택에, 지금 생각해보면 첫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만두기 직전 학기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보았던 학기였습니다. 영어음운론 수업이었는데, 무늬 뿐인 출석 10%에, 중간/기말 각각 45%씩 성적에 반영되는 수업이었습니다. 중간고사 치루고 성적 확인을 했는데, 45점 만점에 20점인가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기말에 만점을 받아야 간신히 C+이고, 45점 만점에 40점 미만을 받으면 D가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는 대학 들어와서 처음으로 수업에 최선을 다해서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난생 처음 제 필기가 동기 선후배 사이에 회람되고, 이게 쟤 필기냐며 웬일이냐는 평가와 함께 C+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기 위해, 수능을 다시 보기 위해 휴학을 했습니다. 가능성을 보고 나니, 그 동안 쌓아올렸던 형편없는 점수를 만회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쓸데없이 꽉 막힌 성격, 자기 마음대로 융통성 없이 굴던 그런 성격이었는데, 두 번째 대학 다니면서 같이 다닌 동기 덕택에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3년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치루고 신입생으로 입학한 터라, 두 번째 대학 다닐 때의 동기들은 저보다 네 살 혹은 재수한 친구들은 세 살이 어렸습니다. 그 중 한 녀석은, 지방에서 올라온 현역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같은 학회에 입부하게 되어서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1학기 말 지날 때 장학금 신청을 하면서 이 녀석의 가정사를 엿볼 기회가 닿았습니다. 구구절절히 써내려 간 장학금 신청 사유는, 외벌이 공무원인아버지 아래에서, 누나도 대학생, 형도 대학생, 자기도 대학생, 심지어 자기는 서울 유학 중이라 꼭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집도 어렵지만, 쟤네 집은 아버지가 공무원인데... 대학생이 셋이나 되니 정말 힘들겠다, 싶어 안쓰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장학금은 성적 장학금이라, 그 녀석도, 저도 받지는 못했었지만, 나름대로 고학생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이 챙겨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갖고 지낼수록, 이 녀석은 조금 색다른 구석이 있었습니다. 실제 막내이기도 했지만, 진짜 막내 같은 구석. 저는 성격이 제멋대로 꽉 막힌 구석이 많았는데, 이 녀석은 성격이 뭐랄까... 한없이 천진난만하였습니다. 어디가나 흐흐흐흐 웃고, 누구랑이랑도 붙임성 있게 잘 지내고, 때론 대강대강, 어쩔때는 그저 포기, 편하고 유쾌하게 지내는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저는 한 때 사랑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첫 학교 2학년 때, 신입 후배에게 좋아함을 고백했다가, ‘오빤 너무 좋은 사람인데,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을 가진 사람이라 자기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더랬습니다. 선배 중에는, ‘사람 좋은 표정에서 나오는 말에 칼이 있다’는 평에 의아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운 경험과 애써 감당하고 있던 무게가 삶을 짓누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늘져있던 삶에서, 그 친구와 함께 지내는 삶은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아홉 명의 학회 동기들과 항상 함께 다녔지만, 특히 그 친구와는 특별히 따로 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난생 처음으로, 교회 수련회 말고, 대학교 엠티 말고, 여행을 그 친구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한 점 구김없는 그 성격의 이유를.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습니다. 국립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자신의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 그 전해까지 대학생이었던 누나는 졸업과 동시에 한 번에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발령받은 수재, 형은 의대 본과생. 형과 누나 모두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한 학교를 다닌 터라, 등록금을 내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고 하였습니다.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집도 처음 보았고, 보아허니 자녀들 방에는 모두 피아노가 한 대씩 있는 것 같았습니다. 3박 4일 동안 그 집에서 기거하면서 넌지시 물었습니다. 야. 아버지가 외벌이에 박봉의 공무원이래매. 형, 누나, 너 모두 대학생이래매. 그 친구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뭐, 틀린 말은 없잖아요? 흐흐흐. 그런 모습이 별로 밉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는 슬슬 고시 공부를 시작하고, 저는 고시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졸업과 함께 취업을 하게 되면서, 즐거웠던 추억과 기억은 모두 옛것이 되었지만, 그 때 배운 것은 다양한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의 가치였습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가 아니라, 너와 나는 다르다는 생각.
사람은 한결같이 자신을 강화하는 쪽으로 생각의 끈을 바짝 조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지는 순간, 지금까지의 삶을 토대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삶의 경험은 강화되는 것입니다. 특히 저같이 선택적으로 융통성 없이 구는 사람들은 더한 편일 것입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기에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삶인데, 없는 것 없이 누리고 살아온 스무 살의 삶을 만나는 것은 꽤나 생경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친구의 꾸밈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천진난만함을 겪었던 것이, 제 삶의 큰 전환점이 되어 주었습니다.
2019년 1학기 중반 쯤의 일입니다. 저희 반 여자 어린이 하나가 쉬는 시간에 쭈뼛거리며 조심스레 제 자리로 왔습니다. 그러고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실 때 무서운 표정으로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되나요? 선생님이 그런 표정으로 말씀하실 때마다 무서워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요.’
무슨 말이야, 선생님이 언제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고~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무섭게 할 일이 없어요. 너희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내가 무서운 표정을 지을 일이 어디 있겠니?
라고 말했지만, 저는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강압의 표정으로 어린이들을 겁먹게 할 때가 있었고, 간혹 의도적으로 그럴 때도 없진 않았다는 것을.
이 어린이의 말을 듣고, 결심했습니다. 표정을 이용하진 말자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학급을 얼어붙게 만들진 말자고. 우리 교실에서 만나는 천진난만함들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교사가 되자는 생각. 교사가 어린이 수준이 되면 안 되겠지만, 교사가 어린이들의 그 밝고 맑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융통성은 부리자고. 교실 속 관계도 소중함을 삶으로 인정하며 지내자고.
관계는 한 수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맺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방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조금이라도 덜 완고하게 살아가기 위한 작은 몸부림임을 교실에서도 체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때의 그 경험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