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談] 1. 산방산, 제주도
#1. 오름
1112번 지방도로, 일명 비자림로를 따라 동부해안으로 달려가는 길에서 제 눈을 사로잡았던 제주도의 모습은, 넓은 들판, 풀 먹는 말들 뒤로 홀로 우뚝 솟아오른 오름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름. 육지의 일반적인 언덕들은 모두 지반의 운동에 따라 그 둔덕들과 골짜기가 자리잡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육지에서 흔히 보는 산들의 모습은 서로 이어져 산맥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름은 이웃이 없습니다. 그저 밋밋한 공간에 파열을 내며 갑자기 등장한 이단아의 모습입니다. 불현듯 터져 올라 그저 무난하던 공간에 울림을 만들어 낸 것. 제주도의 첫 드라이브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오름의 그 독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라면 단연코 산방산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그 때의 경이로움이 선연히 떠오릅니다. 제주도에서의 첫 밤을 마친 후 맞이한 첫 밝던 날, 동부해안에서 애월까지 해안가를 느긋하게 한참 달린 후, 평화로를 따라 추사적거지까지 내쳐 달려 잠시 머문 후, 해 질녘의 해안가를 둘러보겠다고 모슬포에서 해안도로를 다시 탔던 그 때. 알뜨르를 지나 송악산을 오른편에 두고 언덕배기를 찬찬히 올라가다가 그 정점에서 마주하였던 산방산, 그리고 그 앞바다.
2015년 봄에 만났던 산방산과 형제섬, 저 멀리 희미하게 박수기정 (송악산에서)
산방산이야말로 오름 중의 오름이며, 한라산 남서편으로 무난하게 흘러내리는 '뜨르'를 기이한 곳으로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2. 등장
1135번 지방도로, 일명 평화로라 불리우는 길을 통해 애월에서 대정까지 한달음에 갈 수 있습니다. 특히 유일하게 제주도에서 시속 80km를 낼 수 있는 평화로는, 서부 지역의 여러 오름들과 함께 특히 서부 해안을 내려다 보는 위치인 중산간을 세로지르는 고속국도입니다.
애월에서 대정 쪽으로 바지런히 내달리다가 오른편으로 새별오름을 본 후 내쳐 달려가다보면, 제주영어교육도시 방향 출구 인근에서 도로는 약간 오르막을 오릅니다. 출구를 지나치면서 불현듯, 언덕배기에 가리워져있던 제주 서남부의 광경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 산방산이 정면 저 편에서 그 독특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광경이 이채롭습니다.
혹은, 중문에서 사계 쪽으로 가는 1132번 지방도로, 제주 일주도로를 타고 예래를 지나서 왼쪽으로 안덕계곡과 대평리 진입로가 나오면서 정면에서 산방산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때의 등장은 앞선 등장보다는 조금 여상해 보입니다.
올 초, 대평리 옆 군산오름을 (거의 차로) 올라서 마주한 산방산
굳이 차가 아닌, 걸음으로도 산방산은 눈 안에 성큼 다가섭니다. 올레길 10-1 코스인 가파도 올레길. 상동포구에서 해안가를 반시계방향으로 돈 후, 하동포구 가기 전 섬 안쪽으로 접어들어 섬을 관통하는 길 위에 섭니다. 가파초등학교를 지나치기 전 미처 자라지 않은 청보리밭길로 접어들면 산방산이 눈 앞에서 계속 어른어른거립니다.
작년 초, 이제 막 땅을 박차고 올라오기 시작한 청보리밭 저 건너로 보이는 송악산과 산방산의 모습
혹은 대평리에 들어서서 무료공영주차장에 차를 댄 후, 포구 반대편으로 조금 나와서 해안을 향하는 길로 들어서서 파밭을 가로지른 후 해안가에 이르러 포구를 마주보게 되면, 조금 더 가까이 박수기정과 산방산의 경이로운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작년 초, 대평리 해안가를 걷다가 만난, 오후의 산방산과 박수기정
그러나, 제게 가장 놀라운 등장은 모슬포 해안도로에서의 등장입니다. 제주도에 갈 때 마다 두 세 번씩 달려보는 그 길. 알뜨르와 남서부해안 사이를 천천히 드라이브하다가 모르는 사이 송악산 옆 언덕배기를 천천히 넘어서면서, 불현듯 언덕의 정점에서 만나는 사계리 앞 해안과 산방산, 그리고 형제섬의 모습이, 제가 생각하는 제주도 최고의 풍경입니다. 산방산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2016년 봄, 송악산 둘레길에서 만난 송악산 해안절벽과 산방산
#3. 방문
산방산은 2021년 말까지 등반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탐방로를 따라 산방산 중턱인 산방굴사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2015년 봄, 용머리해안 옆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산방산
산방산 아래 주차한 후,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 산방굴사까지 약 20분 정도 걸리는 듯 합니다. 산방산의 그 솟아오른 모습 때문에 올라가는 내내 낙석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고, 덕택에 올라서 보는 사계 쪽 풍경에는 모두 그물망이 그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올 초, 산방굴사로 오르며 보았던, 그물망 사이의 사계리, 송악산
산방굴사가 가장 아쉽습니다. 언젠가부터 부처님을 모셔둔 제례의 공간이 되었으나, 그 공간이 과연 부처님의 공간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일전에 방문하였을 때, 관광객 하나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입구의 보살님께 한 소리 듣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저도 굴 속으로 쑤욱 들어가보고 싶은데, 계속 부처님의 호위하는 그 분들의 한 소리가 내내 걸리더군요. 사실 제주도는 불교 유적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과 탑신의 광경을, 제주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이 하나 있을 뿐. 그런데 산방산에는 사찰이 세 곳이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연혁은 오래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산아래 자리잡은 사찰이야 장소가 가진 그 놀라운 광경에 함께 할 수 있겠지만, 산방굴사는 장소 접근성을 위해서라도 조금의 개선이 필요할 듯 합니다.
올 초, 산방굴사에 모셔진 부처님. 안 깊이 들어가서 둘러보고 싶지만, 쉽지 않네요.
#4. 역사
산방산은 종상화산이라고 합니다. 폭발은 있었지만, 용암의 점성이 높아 분화구로부터 줄줄 흘러 내려가지 않고, 지금의 종형 모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생김새가 묘한 바, 제주 신화에서는 한라산 정상을 거꾸로 파내어 던져버린게 산방산이 되었고, 파내어진 자리가 백록담 분화구가 되었다고 하죠. 묘하게 그 요철이 닮았다고 하니 그 또한 참 묘합니다.
2015년 봄, 용머리해안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올려다 본 산방산
산 중턱의 산방굴사는 여러 스님들이 거쳐가시면서 수도하신 자리라고 하는데, 가장 유명한 분은 초의선사입니다. 추사 선생의 다도 스승으로 유명한 분. 원래 강진에 거하시던 초의선사는 추사 선생을 만나러 제주도 대정까지 오셔서 약 반 년 동안 산방굴사에서 수도정진하셨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네요.
작년 초, 추사적거지에서 추사관 방향으로
그런 산방산은 6·25 전쟁 중에는 포병대의 포격 표적물이 되어 서쪽 산등성이가 허물어 내려앉기도 하였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우리나라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정하면서 모슬포에 제1훈련소를 옮겨두고 군사훈련을 통하여 전장으로 군인들을 투입하였습니다. 그 모슬포에 자리잡았던 포병대가 산방산을 앞에 두고 포격 연습을 하였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모슬포 쪽에 가면 당시 군부대 유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슬포 초입에 제1훈련소 입구 표석이 지금도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구멍 숭숭 난 산방산
#5. 연계
산방산은 송악산과 함께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송악산도 지금은 입산 금지 중. 2020년까지 오를 수 없으니 아쉬움을 뒤로 미루어야 할 듯 합니다.
2015년 봄, 송악산을 오르다 본 송악산 둘레길의모습
산방산 지척에 모슬포가 있어 가파도와 마라도를 항행하는 여객선이 하루에 3~4회 다닙니다.
모슬포와 산방산 사이에는 알뜨르비행장 자리와 함께 섯알오름이 있습니다. 알뜨르비행장은 일제 말기 가미가제 전략을 펴던 일제 최후의 전선으로 아직도 콘크리트제 비행기 격납고가 스물 몇 곳 남아있기도 합니다. 송악산 아래에도 일제시대 비행기 참호가 있는데, 지금은 위험한 관계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섯알오름은 4·3항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과 암매장이 이루어졌던 비극의 장소입니다. 북촌리의 너븐숭이 4·3 유적지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4·3 희생의 아픔이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작년 초 만났던,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설치미술작품)과 섯알오름 민간인 학살터, 그리고 '파랑새'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은 한 곳에 주차한 후 동시에 둘러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용머리해안은 오랜 세월 걸쳐 생성된 사암층이 아마 융기한 후 해안가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해안가를 걸으면 층층이 쌓인 사암층의 기기묘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해안가 산책로 중간에 자리잡은 해녀 할망들의 해산물 먹거리도 볼만하지만, 낙석 위험이 있어 헬멧을 쓰고 다녀야하고, 혹여 밀물 때나 파도가 높을 때는 입장이 금지되기도 합니다.
2015년 봄, 용머리해안, 산방산 오르는 길에 본 용머리해안
차로 2~30분 쯤 가면 대평포구가 있습니다. 박수기정과 함께 하는 일몰이 제주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나절 마을 트래킹으로도 좋고, 올레길 8코스가 시작하는 지점이니 왕복 한 시간 정도 걸려 박수기정까지 올라갔다 오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2017년 초, 대평포구에서의 낙조와, 2018년 초, 대평포구에서의 강태공
모슬포에는 대정 5일장이 있습니다. 제주도 5일장이야 세화 5일장이 가장 유명하지만, 대정 5일장은 그 규모는 세화 5일장보다 좀 더 큽니다. 상설시장 느낌도 약간 있는데...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올 초, 대정오일장과 해질녘 모슬포항
추사적거지는 산방산에서 15~20분 정도 차로 이동하여 대정읍성 인근으로 가야 합니다. 워낙 TV에도 많이 나온 장소이긴 하지만... 추사적거지 옆 대정읍성과 함께, 그 앞에 자리잡은 오리지널 돌하르방 중 하나를 볼 수 있기도 해서 방문의 의미가 있습니다.
2015년 봄의 추사관과 대정읍성
그리고 오리지널 돌하르방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