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딸 이야기] 1. 행복, 자유, 선택
KimTeacHer
0
1193
1
2018.05.22 22:46
행복, 자유, 선택
저희 부부의 첫째딸은 지금 중학생입니다. 1학년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듯 합니다. 아이가 자라 행복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 후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할 수도 있고, 현재 부모가 아이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아이는 행복해하고 있고, 저희도 아이가 행복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행복하다고 생각하니'라는 질문은 어른에게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아이에게 그렇게 물어본 바는 없었지만, 아이가 하는 이야깃 속에서 대강의 힌트는 얻은 바 있습니다. 작년에 저희 아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빠, 애들은 쉬는 시간에 너무나들 바빠. 다들 학원 숙제를 하느라고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울상을 짓고 있거든. 나만 학원 숙제에 시달리지 않는 것 같아."
작년 어버이날에 받았던 엽서. 어린이집 다닐 때 빼고는 이런 것 처음 받았는데... 마음이 묘하더라구요.
네. 저희 아이는 공부에 관련된 학원은 전혀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피아노와 미술을 배우고는 있지만, 둘 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해서 시작한 활동입니다.
피아노는 7살 되던 해에 시작했습니다. 재작년엔가 넌지시 '벌써 오륙년 다녔는데 더 배울게 있겠니?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빠, 난 피아노 학원에서 곡 연주를 배우고 피아노를 치는게 좋아'라고 이야기하길래 그 이후로 더는 묻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저희 아이가 한 번 하면 그만두질 못하는 성격인 것인가. 아이가 5학년을 시작할 때 난데없이 방과후 학교 서예반을 수강하고 싶다고 말해서 (속으로만) 의아해하며 등록해 준 적이 있습니다. 당연한 듯이 계속 하겠다고 하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계속 등록해주고 있었는데, 6학년 졸업을 한 분기 남기고는 별안간 '아빠, 나 이번 분기에는 서예반 등록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길래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2년 가까이 수강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해보는 것은 어떻겠니?'라고 했더니 저희 아이는 단호하게 '아빠, 그냥 그만할래'라고 말하길래 알았다며 더 이상 등록을 하지 않고, 강사 선생님께 인사는 잘 드리라는 말 정도만 해 주었습니다. 그 일 후에 피아노도 자기가 원하지 않을 때 알아서 그만두겠다고 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술은 이번 달에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초부터 집에 있는 만화책 인물을 베껴그리기 시작하더니, 그 활동이 그치질 않고, 도서관에서 일러스트 책을 빌려오고, 일러스트 책을 사고 그러다가 드디어는 작년 말에 미술을 배워보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풍기더군요. 중학교 올라가서 한 두 달 정도 지내보고 자리 잡으면 시켜주겠다고 엄마가 이야기해서, 이번 달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다니는 미술학원이 전문적인 입시 미술학원 쪽은 아니고 활동 중심의 학원이라서 아이가 어떻게 여길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즐겁게 다니고 있습니다.
혹시 집에서 공부를 시키느냐. 당연히(응?) 아닙니다. 저희 아이는 교과 관련 학원은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면 많은 분들께서 '아빠가 사교육 경력이 십 수년이 되고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이니, 집에서 직접 시키는구나'라고 되묻곤 하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무엇인가를 시키거나, 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거나, 무언가 조건을 걸고 넌지시 하기를 유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두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5학년 겨울방학 때, 6학년 겨울방학 때, 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해 본 바는 있지만, 아이가 아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길래 더는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문제집을 사겠다고 해서 문제집을 사 준 적은 있습니다. 3-1 수학, 3-2 수학, 5-1 수학, 5-2 사회, 그리고 6-1 사회, 수학, 과학.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수학. 스스로 문제집을 사겠다고 하길래, 풀지도 않을 것 뭐하러 사냐, 는 말을 하지 않을 만큼의 분별력은 있어서 사 주긴 했지만, 결국 상태는 아주 새 것에 가까운 상태로 집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잠깐 속상했던 적은 있었던 듯 싶습니다. 5학년 2학기 기말 총괄평가에서 수학 과목 점수가 100점 만점에 36점이 나왔더랬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 합니다. 시험 지나고 맞이한 설에 제 아버지께서 올해 소원이 뭐냐고 정말 뜬금없는 물음을 저희 첫째 아이에게 던지셨더랬습니다. 그 때 저희 아이가 수학을 너무 못하게 되어서 올해는 잘하고 싶어요, 라는 대답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초등학교 5학년이 굳게 마음 먹고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닌지라, 그 이후에 한 번은 '아빠, 난 수학이 너무 싫어'라는 말을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너는 아직 수학 공부를 제대로 시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안 해서 점수가 낮은 것이지, 못하는 게 아니란다'라고 말해주면서 '못한다는 말은 힘껏 도전했는데도 결과가 생각에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표현이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은 아니란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빠 생각에는, 언젠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힘껏 도전해보고, 그 때 생각보다 결과가 여의치 않으면 그 때 비로소 싫어하고 포기해도 될 것 같다. 그러니 싫어한다는 생각은 지금은 조금 뒤로 미뤄두고, 하지 않아서 점수가 낮구나, 라고 생각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이가 수학 점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수학을 피하지는 않는 듯 합니다. 지금 제가 이 글을 두드리고 있는 시간에, 자기 방에서 내일 있을 수학 수행평가를 대비한다고 알아서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저희 아이는 정말 자유로운 시간을 마음껏 보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후 네 시. 피아노를 매일 1시간씩, 미술은 1주일에 한 번 2시간 가는 것 말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다가 밤 11시가 되면 인사하고 잠듭니다.
왜 이렇게 키우는가. 다음에 구체적으로 두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간략하게 압축하자면, 저는 제 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압박감때문에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 덕택에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모호함을 가진 채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마침,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인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 두드려볼까 합니다.
문제 해결 알고리즘 중에 '탐색/이용 트레이드오프'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논문을 한 편 쓰려고 할 때, 학생은 다양한 논문을 다양한 범위 안에서 탐색해나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자신의 논문에 참고할 자료를 선택하게 되고 더 이상의 탐색은 멈춘 채 이용의 시점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탐색/이용 트레이드오프'는 어느 시점까지 탐색을 하고 어느 시점부터 이용에 몰두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알고리즘이고, 안타깝게도 저는 기술적인 이야기를 머릿 속에 담지는 못했지만, 아래 내용은 잘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도 한 편의 논문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시점까지는 탐색에 더 중요한 비중이 주어지고 어느 시점부터는 탐색한 것들을 이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 중 많은 수가 탐색의 기회를 박탈당함으로써, 자유로운 탐색 후에 자연스럽게 스스로 이용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너무 힘들어하고 서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 어버이날에는 이런 엽서를 받았네요. 아직은 학교에서 시켜야지만 쓰는 어버이날 엽서이지만... 무난하죠?
저희 아이들이 다양하게 탐색할 시간에, 탐색대신 효율적인 이용에 대해서가르치고, 어떨 때는 이용에 대한 가르침도 없이 연습만 시키며, 때로는 탐색을 금지시키는 것이 혹시 저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다른 분들에게 그것이 부질없다고 말씀드릴 용기는 아직까지 없지만, 저희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점점 단단해져갑니다.
그런데, 저희 첫째딸에게 가끔은 마음이 확 끓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네 시에 하교했는데, 잘 때까지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 저도 모르게 부글부글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두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론이군요...)
2013년 2학기 때 학부모 한 분께서 상담을 오셨습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께서 본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아이가 집에만 들어오면 인사도 제대로 안 한 채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말 한 마디 건네거나 나누는 것 없이 잘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다시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도 그러는지 물으셨습니다. 아니요, 어머니. 학교에서는 얼마나 밝고 명랑하게 아이들에게나 담임교사에게 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아마도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서, 사춘기가 뭐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가까운 어른들 - 부모나 교사 - 과의 생각이 다른 것을 확인한 후에 그것을 어떻게 조정할 줄 몰라서 그저 숨는 과정이니 절대로 두려워하시거나 어렵게 생각하시지 말고, 따뜻하게 아이의 어떤 생각이 어른들이 하는 생각과 달라서 불편해하는지를 확인하시면 될 듯 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아이를 불렀습니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너희는 자라지만, 어른들은 너희의 변화를 하나하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희에게 너희 스스로의 변화는 너무 크지만, 어른들에게 너희의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거든. 너희의 1년은 너희 자신의 인생 전체의 3분의 1 혹은 2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 마흔 살인 어른에게는 너희의 1년이 어른이 지내온 삶의 고작해야 3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기간이거든. 생각해보렴. 아마 어머니가 너를 보실 때 아마도 일곱 살 때의 너, 여덟 살 때의 너, 혹은 열 한 살 때의 너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보이실거야. 너는 벌써 키가 170센티미터가 다 되어가지만, 너를 태어날 때의 모습부터 봐오신 어머니께는 과연 그런 변화가 쉽게 받아들여지실까? 그러니, 너의 변화를 어머니께서 알아차리지 못하신다고 어쩔줄 몰라서 숨지 말고, 어머니께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드리렴. 저, 이렇게 컸어요, 라고 말이지.
이제 제가 그 때의 어머니에게 들려드렸던 이야기를 제게 돌려주고 있습니다. 아이의 변화상을 기억하면서, 내 아이의 성장을 믿고 신뢰하자.
지금은 저희 아이가 하루에 대여섯시간 핸드폰을 하지만, 항상 똑같은 것을 하지는 않습니다. 팬픽을 자기 블로그에 연재하기도 하고, 웹툰도 보고, 웹소설도 보고, 자신이 트레이싱할 그림을 핸드폰을 통해 찾기도 하고, 유튜브를 통해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핸드폰이라는 매체를 다양하게 이용하는 것이죠. 3월 전에는 저 중에 팬픽이 없었습니다. 작년 말 전에는 웹소설이 없었구요. 작년 하반기에는 웹툰도 없었습니다. 작년 초에는 그저 핸드폰을 가지고 유튜브 음악을 듣거나 트레이싱 용도의 그림을 찾는 수준이었으니 매체 사용 습관이 좋아졌습니다.
저희 아이가 4학년 때는 집에 있는 아빠 만화책을 쉴틈없이 읽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맨날 그것만 읽냐, 고 말할 정도로 읽었는데, 5학년 때는 그것이 딱 멈추고 다른 만화책으로 옮겨가더군요. 우려의 눈빛을 가졌지만, 그것도 한 1년 만에 거들떠도 안 보더군요. 그러더니 아빠와 캐치볼을 하겠다면서 글러브와 연식 야구공을 사와서는 한동안 아빠를 괴롭히더니, 작년 중반부터는 그네(;;)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네 이야기는 또 두드릴 기회가 있을 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도서관을 하루에 두 번 정도는 가는 듯 합니다. 가서 맨날 학습만화 - 와이... - 만 보더니, 요즘은 자기 관심사에 대한 책도 쏠쏠하게 찾아보는 듯 합니다.
급기야, 작년에는 학교 문제해결 글짓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왔습니다. 아마 학교에서 근무하시니 아시겠지만, 학년에서의 1등상은 적어도 저희 아이 반에서는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글을 담임 선생님께서 가지고 간 것입니다.
부모로서, 저는 제 와이프와 함께 저희 아이의 일련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머릿속과 마음 속에 담으려는 노력을 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의 모습에 대해 의심이 찾아올 때, 저희 아이가 끊임없이 자라고 변하면서 다양한 탐색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아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살아내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그 때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저희 아이의 행복함이 줄어들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돕고 응원할 생각입니다.
아이의 앞서 걷기보다는, 아이의 뒤에서 아이의 선택을 부모로서 적절하게 조언하되, 아이의 선택이 가장 존중될 수 있도록 첫째딸을 - 그리고 둘째와 세째딸도 - 키워내고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