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이야기] 5. 관계는 더 세밀해진다
제가 담임할 때 M에 대해 남아있는 1학기의 기억은 히스테리컬하다, 입니다. 버릇없거나 반듯하지 않거나 하진 않았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담임 자리에 와서 저한테 ‘학원 가기 싫어요’, ‘학원 숙제 하기 싫어요’ 라는 말을 짜증 가득 담아 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짜증의 대상은 제가 아니니, 저는 ‘그럼 그만 두면 되지’라고 말해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1학기 학부모 상담 때, 학부모님께서 제가 아주 하소연을 하고 가셨습니다. 아이가 집에서 짜증을 부리는데 아주 못 견디겠다고.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가 학원에서의 과제량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학원 가는 것을 굉장히 스트레스 받아하고 있다, 이럴 때 문제의식 없는 학원행은 나중에 진짜 학원이 필요할 때 아이를 납득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그만두게 하셔라. 학부모님께서는 돌아가서 그 즉시 아이의 학원을 모두 그만 두셨습니다. 아이는 밝아졌고,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교실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학원을 가지 않게 되니, 방과 후에 남아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교실에서 선생님 및 다른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하교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2학기 시작할 때, 아이와 면담하면서 슬쩍 물었습니다.
- M아. 너 학원은 계속 안 다닐거니?
- 네.
- 그런데, 공부는 할 거잖아?
- 네.
- 공부는 어떻게 할거야? 어떤 식으로 배워나갈거야?
- ...
- 선생님이 공부하는 방법 하나 알려줄테니까, 한 번 해 볼거야?
그래서 M에게 수학을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떻게 진도를 이어가면 좋을지도 알려주었습니다. 다른 스트레스가 없으니, 이 아이는 꾸준하게 자신의 학습을 이어갔습니다. 6학년 때도, 그 이후에도. 물론, 스스로 하는 공부이다보니 자기 관리의 측면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에 두 번 정도는 본 듯 합니다. 다른 친구 몇 명에게도 같은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 친구들끼리 이를 매개로 서로 연락하면서, 함께 교실에 찾아오곤 합니다.
M의 동생이 올해 6학년입니다. 제가 담임하지는 않고 있지만, 오고가는 복도에서 마주치곤 합니다. 한 번은 물었습니다.
- 야. 언니는 이번 1학기 기말고사 어떻게 봤대?
- 어... 언니 굉장히 잘 봤대요.
지난 6월에 학교에 왔을 때,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바쁘기도 하고 정신없기도 해서 연락해 보는 것을 잊었는데, 동생 편으로 소식을 듣습니다.
- 어허. 언니가 그렇게 시험을 잘 본 것이 누구 덕인지 알아? 다 선생님 덕이야.
- ...
- 그런데, 시험 끝났는데 전화도 한 번 안하고. 가서 언니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전해! (웃음)
- 네...
지난 주에 M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주에 학교에 아이들과 함께 오겠다고.
같이 밥 먹으면서는 내내 U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습니다. U는 자신의 역량과 노력에 대한 믿음이 덜한 편이라 어려움을 자초하곤 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던 와중에, M에게도 슬쩍 물었습니다.
- 수학은 얼마나 받았어?
- 하나 틀렸어요.
전반적으로 우수한 성취를 거둔지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표정 앞에서, 계산 실수로 틀렸다며 배시시하게 웃는 아이에게 되물었습니다.
- 어때. 성적이 좀 나오니까 기분 좋지?
- 네.
-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 들어요. (배시시)
그러더니, 올해 초부터 다니기 시작한 영어 학원 - ‘선생님, 저 엄마가 영어학원 다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는 문자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 에서는 특별히 배울 것은 없지만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재미가 있어서 간다는 이야기, 요즘 동생 가르치면서 10만원 받는다는 이야기 등등등을 자신 있는 목소리로 해 나갔습니다.
같이 온 두 명의 친구가 조금 더 자극을 받은 모양새입니다. 6학년, 동일한 배움의 방법으로 같은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는데, M의 성취감이 내심 좋아보였나 봅니다. 특히 U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서로 도와주고 도움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서로 진도도 체크해주고 격려도 해 주면 좋겠다고. 혼자하는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배움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 때 담임이었던 저도,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학습에 대한 자극을 줄 수 위치를 가지고 있는터라, 간혹 찾아오면 이야기 나누면서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곤 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성취에 대해 고무적으로 판단한 부분은, 아이가 교재 한 권 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취를 거두었다는 것도 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추천한 교재는 난이도 너무 높지 않고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세 장 정도씩 하면 두 달 안쪽으로 끝낼 수 있는. 그리고 새로운 교재로 갈아타지 않고, 풀었던 교재를 반복하여 풀어보며 모르는 문제가 없도록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안내하였습니다.
한 권만 제대로 풀면 된다. 그것에 대한 성공 케이스가 저 하나를 넘어서서 하나의 케이스가 더 생기게 되었습니다. 계속 그런 케이스가 생겨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M은 배움에 대해서는 보수만 적절하게 해 주면 되는 상태가 된 듯 합니다. 동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배움에 대한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학생 때 가장 쉽게 생길 수 있는 동기 기제는 ‘성취감’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성취에 대해 만족하고, 이 성취를 계속 유지하거나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이제 알아서 자신의 배움을 끌어올리려고 고민하고 실천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적절한 코멘트를 도와주면 됩니다. 이 역할은 공교육 교사가 가장 잘 해 줄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비용에 대한 고려 없이 학생에게 적절한 코멘트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초등교사,특히 6학년 시절의 담임은 학생의 교과 배움 과정과 발달 과정을 지속적으로 보아온 터라 의미있는 코멘트를 건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코멘트의 영역은 배움에만 특화될 필요는 없습니다. 블로그에 두드리기 조심스럽지만, 배움 외적인 영역에서의 코멘트도 학생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기도 합니다.
저희끼리의 밴드에, 한동안 뜸했던 M의 학습 진도 체크가 그제 어제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담임교사와의 시간이 잘 해 나가고 있는 아이를 더 잘해가도록 만드는 자극이 되어준 듯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