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사회] 1. 조선후기 (01) 임진왜란
사회 과목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실제 수업 시작이자 조선 후기 첫 시간으로, '임진왜란'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면서 발생한 전쟁을 우리나라의 시각에서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 라고 해봐야 세 나라 말고는 유의미한 세력이 없었긴 했지만 - 의 조선, 명, 일본 3국이 모두 참전한 전쟁이라 국제전쟁 격의 성격을 띄고 있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접근과 조명을 하고 있지만, 초등학생들이 다룰만큼의 주제는 아닌 터라, 그 명칭을 임진왜란으로 통칭하고 넘어가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임진왜란의 원인을 살펴보자면 일본 전국시대의 종료(1587)를 보통 언급하게 됩니다. 일본은 약 백여년 동안 전국시대의 소용돌이를 경험합니다. 일본은 일황을 정점으로 한 정치체제를 오래 전부터 구성하여 지속하여오고 있지만, 일황의 정치적 역할은 항상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역할 그 이상을 넘어선 적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11세기의 가마쿠라/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이래로, 일황은 막부의 상징적 존재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약화되면서 일본은 각 성주의 세력 쟁탈전 아래에서 약 백여년 동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국시대라고 일컬으며, 그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가나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일단) 그 깃발 아래 모두 복종하는 것으로 종막을 고하게 됩니다. 이제 일본 전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에 의해 통치되며, 다른 성주들은 그 아래 숨죽이며 (일단) 복종을 맹세합니다. 그런데, 지난 백 년 간이나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그 몸집을 키워온 무사 집단이, 수면 위의 평화로움을 과연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사를 읽다보면,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에도 막부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한 일은 사무라이의 관료화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싸움의 최전선에서 길들여진 싸움기계들을 서서히 와해시키는 전략이 아니라, 그 힘을 외부로 분출하는 방법을 도모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과 조선)을 향한 대외 전쟁의 선포였습니다.
'정명가도 -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데 길을 빌려다오'라는 말로 대표되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응하였을까요. 당시 조선의 상황은, 건국한지 이백년 동안 소소한 싸움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진과 왜구가 끊임없이 우리나라의 변방을 침략하였지만, 이것이 전면적인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던지라,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상황은 평화로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보니 전쟁 대비에 대한 인식이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시 병력 운용체제는 개국 이래로 '제승방략체제'라는 제도로 운용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즉, 전시에 중앙정부에서 사령관이 전장에 투입되면, 전장에 가까운 농민들이 무기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 정해진 시간에 모여 전쟁을 치루는, 지금으로치면 예비군 제도와 큰 차이 없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에는 상비군, 즉 직업군인 제도가 마련되어있지 않은 채로, 전시에만 병력을 동원하는 제승방략체제가 운영되어 왔습니다. 이 제도가 잘 운용되려면, 마치 때마다 예비군 훈련을 통해서 병력 운용의 연습을 하듯이, 때마다 병력 운용을 시험하여야 하는데, 약 이백년 동안 전 국토 범위로 이 제도를 운용할 기회 - 국가간 전쟁 - 가 없었던터라, 시간이 흐를 수록 조선의 전시 전쟁 수행 능력은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당시 선조 임금 시대에 병조판서 - 지금의 국방부 장관 격 - 를 지내던 율곡 이이 선생은 '십만양병설'을 주창하며, 상비군 운용제도의 필요성을 강변하였다고 전해져오지만, 실상 이백년 동안 별다른 전쟁 없이 지낸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십만명이나 되는 상비군을 평시에 운용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인 듯 합니다. 보통 율곡 이이 선생의 '십만양병설' 주창을 임진왜란 대비에 대한 혜안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으나, 실제로 십만양병설에 따라 상비군 십만 군대를 모집했다면 아마 상비군 운용 비용의 문제 때문에 임진왜란 전에 조선은 국가 파산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군사적으로는 전혀 대비없이 전쟁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 조선은 사림 세력이 해묵은 훈구파와의 다툼을 승리로 마무리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4대 사화로 일컬어지는 사화 -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 - 에서 사림 세력은 지속적으로 훈구 세력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물론 갑자사화나 을사사화는 명확하게는 사림과 훈구 세력의 대결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기묘사화의 경우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이 사약을 받으면서 무오사화 이후에 간신히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늘려온 사림세력이 정치 일선에서 패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사림 세력이 모두 산림으로 은거해나가게 되고, 조정은 훈구 세력 및 외척 세력들의 권력 다툼의 장이 되어버립니다. 중종 사후에 인종 모친 세력인 대윤 세력과 명종 모친 - 문정왕후 - 세력인 소윤 세력이 맞부닥친 을사사화는 조선 중기 외척 세력의 진검승부로, 결국 이 싸움에서 승리한 소윤 세력이 조정의 실권을 오로지하여 사리사욕에 눈이 먼 모습으로 국가 질서를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유명한 구월산의 도적 임꺽정이 세력을 떨치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명종 후기 왕권 강화를 꾀하던 명종에 의해 사림 세력이 지속적으로 조정에서 다시 역할을 부여받게 되고, 문정왕후 사후와 이후 명종의 사후, 선조 즉위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나가던 사림 세력은 마침내 소윤 세력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중앙정부의 실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상황은, 명종 치세 당시의 외척 훈구 세력의 토지 겸병 등 국가 질서 문란의 혼란스러움을 조금씩 해소해나가던 시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강력한 무기인 조총을 앞세워 조선의 군대를 추풍낙엽처럼 허물고 삽시간에 북진하여 4월 말에 도성인 한양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 군대도 신립 장군이나 이일 장군 등이 수 만의 군대를 끌어모아 일본군에 대항해 보았지만 평화로운 상황에 제대로 된 위기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조선의 군대가, 백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내내 치고받아온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신립 장군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대패한 이후에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도성 한양을 내어주고 서해안으로는 대동강까지 동해안으로는 회령, 경흥까지 일본군에게 밀려 후퇴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일본군의 기세도 한풀 꺾이게 되는데, 그 까닭은 보급의 어려움이 가장 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 시기의 전쟁에 대한 현대인의 무지함은 보통 보급에 대한 무지로 잘 드러나는 듯 합니다. 기본적으로 병사도 사람인지라,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급 문제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것이 훌륭한 장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멀게는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200만의 군대를 동원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많게는 그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인원은 전투병이 아니라 보급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글을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있고, 나름 타당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병사 1인이 한 달 먹을 쌀만 짊어진 채 행군하려고 해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에 전쟁을 치루러 온 일본군에게도 전투 식량의 보급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아마 일본군은 두 가지를 고려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기본적인 보급은 준비하되, 전황을 보아 점령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깊이 고려하고, 둘째, 육상으로 운반할 수 있는 보급의 한계가 있으므로, 수군을 활용해서 거점도시에 보급을 하는 것을 고려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성인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추수 시기 이전에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는 것과, 주요 해안 도시에 병참선을 연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순신 장군과 우리 수군의 대활약이 임진왜란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가는 두 말하면 잔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 수군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아서고, 서해쪽으로의 보급선을 끊어버린 까닭에 일본군은 평양성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일본 내부에서도 이 쯤에서 전쟁을 멈추자는 의견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와중에,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사림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각 지역에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이들의 활동이 보급의 어려움에 시달리던 일본군의 사기를 대폭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의병으로, 김덕령, 고경명, 곽재우, 정인홍, 서산대사, 사명당 등이 있어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일본군을 아래쪽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결국 기세좋게 우리나라 강토를 유린하던 일본군은 그 기세가 현저하게 꺾여 명나라와 길고 지리한 휴전 협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휴전 협정 중에 조선 백성이 받은 피해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군이 우리나라 땅에 머물고 있었구요. 아마도 보급을 점령지에서 해결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명나라 군사도 (기록상으로 이여송 장군이 5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꽤 많은 숫자가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 보급은 우리 조정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자체적인 보급도 하였겠지요. 더하여 일본군은 조선군의 수급을 인센티브로 걸었고,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의 수급을 인센티브로 걸었다고 합니다. 수급을 가지고 다니기 힘드니까, 코나 귀를 베어서 가지고 다녔다고 하죠. 뭐 군사만 죽였겠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약탈과 노략질의 대상이 되다 못해, 죽음으로써 군사 역할도 했어야 하는 것이죠. 교토의 귀무덤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었던 참상을 생생하게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없는 상황도 있었구요.
결국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휴전협정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20만 군대를 다시 조선 땅으로 침공시킵니다. 1597년의 정유재란은, 정유년에 다시 벌어진 전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게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철군할 때까지 또다시 우리나라 남쪽 땅을 헤집으면서 노략질합니다. 그러다가 철군하면서 치루는 마지막 전투가 바로 노량에서 벌어진 노량해전이고, 그 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면서 수많은 왜군을 바닷속에 수장시킵니다.
이렇게 마무리 된 임진왜란이 조선과 일본, 명나라에 끼친 영향을 한마디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요동 주둔군을 파견하였는데, 덕택에 요동에서 부족 단위에 머물고 있던 여진족의 통합을 제때 견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여진족은 요동의 권력 공백을 활용하여 부족간 통합을 이루게 되고, 이를 통해 요동을 발판으로 명나라 땅을 넘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다들 아시는대로 명나라의 멸망(1644)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명나라의 멸망은 물론 명나라 내정의 혼란스러움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환관정치로 요약되는 명나라 통치의 혼란에 더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은 명나라 조정의 재정 상황을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의 권력투쟁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해냅니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을 확정짓는 전투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열고 정이대장군(쇼군)에 오릅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이 벌어질 때까지 지속된 이 정치체제를 우리는 에도 막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는 이후 적극적으로 조선에 사정하여 1608년 다시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이후 12번의 통신사를 조선으로부터 유치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계기로 삼기도 합니다. 조선은 이후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제조지은(명나라가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해 주었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을 앞세운 존명배금(명나라를 존숭하고 후금/청을 배척한다) 정책과, 명나라와 후금 간의 세력 관계를 살펴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는 소위 중립외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계기가 됩니다. 광해군의 영창대군 사사 사건과 인목대비의 유폐 사건이 광해군의 정통성을 흔들어놓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만, 후금의 눈치를 보며 명나라의 은혜를 모른척하는 예의없는 태도도 결국 인조반정으로 왕이 바뀌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됩니다. 또한 말발굽에 짓밟힌 조선의 가장 큰 어려움은 수확 가능한 토지가 확연하게 줄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토지 뿐만 아니라 인명의 사상도 어마어마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국가의 부가 줄어들게 되었고 재정상황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바로 토지조사(양전)을 실시하지만, 오랜 전쟁이 가지고 온 참상은 전쟁 이전의 국가 부를 되살리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전쟁 이전에 유지되어오던 조(소득)·용(요역)·조(공납) 시스템을 손 볼 필요가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방납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원성을 샀던 공납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공납 제도의 개선에 대하여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1608년에 공납 제도를 기존의 공물 진상에서 쌀의 진상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시스템은 임진왜란 이후의 혼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대동법은 1608년에 시범적으로 경기도 인근에서 시행되어 근 100여년 동안 순차적으로 확대실시되게 되었고, 이러한 세금의 시스템은 이후의 균역법 같은 다른 세금 시스템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여 첫 사회 시간 교수-학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아래는 학생들의 배움일지 정리.
다음 시간에는 대동법 실시의 배경과 진행 과정, 조선 후기 사회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