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머지 공부로 자존감 갉아먹기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3. 나머지 공부로 자존감 갉아먹기
대학을 세 번 다니는 동안, 학비와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짧은 시간에 조금 더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로 과외가 있었고, 덕택에 십수년 간 한 150여명 정도를 개인과외로 만났습니다. 학원 강사로 생활했던 1년 7개월을 더하면, 사교육 경험이 짧지는 않은 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짧지 않은 사교육 경력에서, 특히 학원에서 강의할 때 ' 강의하는 클래스에서 가장 못하는 아이'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곤 하였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늘 강의에서 소외되기 마련 - 과제를 잘 하지 못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소극적이거나 -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중심으로 강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원 아이들에게도, '나는 항상 이 클래스에서 가장 많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친구를 중심으로 가르치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남의 돈으로 움직이는 학원에서는 절대로 이러면 안됩니다. 그런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는 반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는 것은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의 클래스에서 가장 잘 하는 친구 하나를 골라 그 아이를 더 잘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잘 하는 아이들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며, 핸들링하기도 훨씬 쉽습니다. 게다가 그 학생이 잘함으로써 나머지 아이들에 대한 면죄부까지 완벽하게 받아낼 수 있습니다.
학원의 생리와는 반대로 움직이는 저 스스로를 보면서, '나는 사교육으로 벌어먹긴 힘들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과외로 만나는 아이들도 항상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이기도 했었고... 가르치는 시간보다 상담하는 시간이 더 많은 적도 있었습니다.
사교육보다는 공교육이 더 맞는 사람.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으면서, 그래서인지 학습 부진 아동 -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쉽지 않아, 일단 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 교육에 관심을 갖고 내 교실에는 학습 부진 아동이 없도록 더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2014년에 만난 '누구누구'는, 밝고 명랑하며 쾌활한 여자 어린이였습니다. 키는 조금 작았지만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였는데, 그러나 여러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고 수업 시간에는 위축되는 모습을 종종 보였습니다.
수학 시간에, 이 아이가 수학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임을 쉽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스무 문제짜리 단원평가를 단원 마지막에 치루곤 하였고, 이 아이의 결과는 당시 제가 근무하던 지역의 '특별보충 대상' 점수인 60점 언저리를 왔다갔다 하곤 하였습니다.
4월 말에, 이 아이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시켜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방과 후 한 시간씩. 문제집을 제 돈으로 샀고, 한 시간 동안 이 아이가 푸는 것을 주시하면서 적시에 개입하는 방법으로 지도하였습니다.
수학을 하지 못하거나 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 강의형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강의형은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그저 강사의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수학 부진 아동은, 하나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하나하나에 대해 확신을 두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게다가, 과정 하나하나를 효율적으로 구사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구누구'도 그랬습니다. 3.14 곱하기 100을 푸는데, 이 아이는 아래와 같이 풀었습니다.
적정량의 문제 혹은 과제물을 부여한 후 그저 풀리게 하는 방식의 연습은 수학 부진 아동에게는 적정량을 넘어서는 분량이 될 수도 있으며 특히 비효율적인 풀이 과정을 강화하는 효과를 거두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지도하려면, 이 아이들의 풀이 과정을 하나하나 봐 주어야 하고, 그 때 그 때 교정해주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실시간으로 선수학습과정을 되짚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이 당시 저는, 자릿값 개념을 처음부터 다시 짚어주어, 3.14 곱하기 100은 계산할 필요 없이 바로 314의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켰습니다.
이 아이는, 11월 말까지 매주 2회 한 시간씩 꾸준하게 학습을 이어갔습니다. 나름 성적도 향상되었고, 무엇보다 자신감도 좀 생겼습니다. 2학기 때에는 학급부회장 선거에도 출마해서, 16대 15로 졌던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결국 좋아지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진학 후, 한 번 학교에 찾아오긴 했지만 더 이상의 교류는 없었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학습적으로 유의미한 성취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가정에서의 돌봄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는 분들이셨습니다. 아이들보다 일찍 일터로 나가셔서, 10시가 다 되어서야 가정에 돌아오시는 분들이셨습니다.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와 이 아이는 하교 후 늘 집에서 TV와 인터넷을 통해 전파와 랜선 너머의 세계를 만나는데 훨씬 익숙하였습니다. 다행히 부모님과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어머니와도 여러 차례 통화를 나누었는데, 항상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저으기 안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결국, 학습 부진의 이유는 교실 안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학습 부진의 문제는, 교실과 교실 바깥이 연계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가 교실 바깥까지 고려하긴 어렵습니다. 특히 위와 같은 '문제 풀이 연습'의 방식으로 아이들의 부진을 해소하겠다는 방식은 딜레마에 처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자존감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남아서 선생님과 공부 좀 더 하고 가자'라고 하면 아이들이 모두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저희 반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서 보드게임을 하고 가곤 했기 때문에, 담임과 학교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군요. 수학 부진을 이유로 몇 명의 아이들을 남겨 보았지만, 하나같이 싫어하였습니다. 격렬한 거부감의 표시, 앞에서는 대답하지만 방과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들, 남았지만 주눅 든 자세로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던 모습들까지.
그제서야, 우리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사의 열정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아이러니. 수학 부진 아동에 대한 나머지 공부의 모습입니다.
나머지 공부는, 아이들의 실패감을 강화할 뿐입니다. 교사의 열정과 친절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아이들을 더 주눅들게 만들고 더 큰 거부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이 아이들에게 진짜 계기가 찾아오더라도, 이 아이들은 그걸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흘려보내기 일쑤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아이들에게 '나도 해 봤어' 같은 인식이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나, 남아서 나머지 공부 해 봤는데, 별 소용 없었어. 더 이상 할 필요 없어. 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접근이나 처방도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섣부른 제안과 강요가, 이 아이들의 결정적 시기를 막아설 수도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별 고민없이, 교사의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비전문적인 행동이 교실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해라'라는 말에 대한 성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공부는 왜 하는 것입니까.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공부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까닭을 토대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개념과 원리의 이해 없는 기능과 활용 중심의 수학 수업처럼, 공부에 대한 충분한 성찰 없는 공부 방법의 투입과 이의 활용은 아이들을 기능인으로 만들 뿐입니다. 수학을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의 형성 없이, '너 수학 점수가 낮으니까 남아서 배우고 가' 같은 말은, 교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에게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수학 부진 아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 아이들을 연습시켜 능숙하게 만들면 수학 부진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같은 처방 일변도의 생각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현장에서 말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