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 아이를 알아가는 시간
내 아이를 알아가는 시간
아직 원하지 않는 아이들, 이제 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님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갈등이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집에서 그저 퍼질러 앉아서 핸드폰이나 하고 PC 게임이나 하는 모습을 보이면 속이 터져서 학원을 보낸다, 학원이라도 가면 그래도 수학 한 문제라도 풀테니 집에서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 그런 아이들은 학원 가도 수학 한 문제 제대로 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학원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굳이 애쓰지 않습니다.
태도와 자세의 문제는 결국 가정과 학교에서, 즉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곳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번 화에서는 일단 가정에서의 이야기부터 두드려 볼까 합니다.
집에서 퍼질러있는 아이들을 보는 학부모님의 속이 터지는 까닭은, 바라는 모습으로 아이를 계속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아이를 볼 때마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끊임없이 부모의 욕구를 끊임없이 강화되고 있는데, 우리 아이는 그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이 안타까움.
과연 무엇이 부모의 욕구를 강화시키는가.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과대포장되고 과대대표되는 '잘 난' 케이스입니다. 이 케이스는 사회 전반적으로 선호되기에 더 쉽게 퍼져나가고, 개별적인 케이스에 불과한 그것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고 섣부르게 일반화됩니다. 내 아이의 모습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별 불만이 있을리 없는데, 강화된 내 마음 속 바램이 내 아이에 대한 불만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애는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되었는데, 왜 아직도 맨날 저렇게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과제 하나 제대로 못하는거야! 이제 중학생씩이나 되었는데도 해야 할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모습은 언제쯤 벗어날거야!
그 때문에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게 쉽지 않아지게 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프로토-타입이 특별한 근거도 없이 부모 속에 슬쩍 자리잡게 되고, 과대포장되고 과대대표된 사례들은 유령처럼 부모의 주변을 배회합니다. 그런 잣대로 내 아이를 바라보면서 판단할 뿐, 그렇게 형성된 프로토-타입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내 아이가 드러내는 발달의 모습과 성향과 취향과 지향점은 무엇인지 뒷전으로 밀어 놓고는 그저 요구하고 닥달하고 채근하고 재촉하게 됩니다.
1. 먼저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가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처방은 현재의 상황을 진단한 후에야 가능합니다.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런저런 처방전부터 자꾸 끊지 말고, 내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찬찬히 지켜보는 일부터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이견이 있는 지점은,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일 것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저 어릴 적에는 부모님께서 지나가시면서 '공부 좀 해라'라고 말씀하시는게 자극의 전부였으니, 초등학교 때는 그런 말씀에 움찔하다가 중학교 가서는 한 귀로 듣고 두 귀로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중학교 1학년 2학기 첫 시험을 (부모님 보시기에) 기대 밖의 성적을 받은 후에야, '그래, 공부가 뭐 중요하니, 해도 안 되는거, 신경쓰지 말고 그저 건강하게 크는게 중요하지'라는 말씀을 듣고는 움찔함으로부터 벗어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 바쁘시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시기에도 벅차셔서 저에 대한 신경은 거의 쓰지 못하시는 그 순간, 저는 제 스스로 제 공부를 찾아갔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더 보태자면, 중학교 2학년짜리 첫째 아이에 대해서 제가 학습에 대한 첫 개입을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결과를 본 이후입니다. 구닥다리 이론이긴 하지만, 피아제의 발달심리학에서는 만 12세를 구체적 조작기에서 형식적 조작기로 발달하는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발달 편차를 폭넓게 인정하자면, 저는 중학교 2학년 첫 시험에서 망한 이후에, 그 망한 것을 토대로 서서히 아이를 끌어 올리면 아이도 쉽게 수긍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이에 대한 저희 부부의 개입은, 하루 23시간 여가 시간을 보내고 하루 한 시간 수학 문제집 스스로 풀기, 까지입니다. 한 시간을 다 채우지 않아도 괜찮고, 풀이하는 순간 내내 핸드폰을 쥐고는 한 문제 풀고 핸드폰 들여다보고, 또 한 문제 풀고 핸드폰 들여다보고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번 중간고사 본 후, 결과를 토대로 그런 부분들을 이야기 나누면서 조금씩 잡아가면 되는 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아직까지 최대한의 개입을 자제하고 아이가 그저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다행히 저희 아이는 지필고사 점수가 저조한 것 말고는, 수행평가 점수도 나쁘지 않고, 수업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도 칭찬받는 편이며, 담임 선생님이나 주변 이들로부터 요즘 중학생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 이전에 정해진 루트를 따라가면서 누구보다도 높은 성취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런 모습을 내 아이도 갖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루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삶을 교정해가면서 살아가는게 더 효율적입니다. 사실은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가는게 더 맞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처음 그렸던 밑그림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자꾸 그 밑그림대로 행동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삶에 대해 부모로서의 밑그림을 미리 한 번 쯤 대신해서 그려 볼 필요는 있겠지만, 그 밑그림을 바꾸어가는 삶의 주체는 부모가 아닌, 부모와 자녀가 함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피아제의 발달 이론을 토대로 제 개인적인 경험을 더하여,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2. 부모를 보여주며 내 아이의 의견을 청취할 필요도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부모는 여러모로 참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맞벌이는 일상이요, 부모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다양한 방식의 요구와 압력을 받으면서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조금씩 자라가면서, 부모는 아이가 빨리 제 할 일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 말의 기저에는, 아이의 인생도 있지만 부모인 나의 인생도 있다는 인식이 있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것은, 양육과 보호의 시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월등히 길다는 지점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서툴고 힘든 이유는 정신과 육체가 발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길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부모는 자꾸 자녀를 빨리 놓고 싶어합니다. 학원에 보내고, 자기만의 삶을 살길 원하고, 부모와는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 부모의 삶이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에, 부모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고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녀가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자녀의 삶을 지켜보고 함께 할 책임도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법이 만 18~20세 까지의 아이들이 미성년자로써 부모와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요즘 부모들에게는 가족 간에 누릴 여가의 삶과 시간, 마음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각자의 취미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가족 공동체가 함께 누릴만한 취미나 여가 활동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있더라도 가족 공동체가 잠시 함께 누리다가 금새 자기만의 영역으로 헤어지는 모양새가 되는 듯 합니다.
먼저 부모가 자신의 흥미와 관심을 누리고 즐길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먼저 여유를 찾고, 자신의 좋아하는 것을 즐기려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그런 흥미와 관심이 자녀들에게 지속적으로 투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이 자녀들에게도 드러나고, 더 나아가 자녀들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자녀들은 어릴 적에는 부모의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다 좋아하고 흥미있어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공부로 내 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아이와 부모는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던 지점을 잃습니다. 사실은 더 나아가면서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의 것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기회 - 평가 - 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중학생 아들 딸을 어디 놀러 같은데 데리고 가면 의아한 시선 - 데리고 오는 부모도, 따라오는 아이들도 독특하다는 평가가 수반되는 - 아래 놓이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와 수평적인 위치에서 판단하고 평가할 기회를 주지 못하는 까닭은,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쥐고 흔들기 때문입니다. 왜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기회를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유예당하는 것일까요.
제가 즐겨읽는 책 중에,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에 이를 되돌아보는 구절이 있어 간단하게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자녀에 관해 생각해 온 방식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이가 여러 면에서 인지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으례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아이의 이용 능력을 보면, 너무나 미흡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신발끈도 못 묶고, 장기 계획도 제대로 못 세우고, 주의 집중도 잘 못한다. 정말로 그런 일들에는 엉망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단추를 눌러대거나, 새로운 장난감에 매우 흥미를 갖거나, 한 가지에서 다른 것으로 재빨리 옮겨 다니는 일은 너무나 잘한다. 아이의 목표가 탐색이라고 한다면, 아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 p105
위 구절은, 우리가 논문 같은 것을 쓰기 위해 자료를 서칭하다가,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때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는 그렇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우리는 미친듯이 논문을 서칭하여 읽고, 참고자료를 탐색하고, 찾고 조사하고 알아보는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제 써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 동안 탐색했던 것을 이용해서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는 일에 돌입하죠. '탐색-이용 트레이드오프'라는 이 알고리즘은 탐색 지점과 이용 시점의 최적화를 알아보는 알고리즘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자신이 그 동안 쌓아왔던 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삶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스스로에 대해 혹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관계를 탐색하는 시점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마 누구나 다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이 스스로 겪을 시행착오도 부모가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위 구절은 담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서는 홀로서기는, 실은 스스로 서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귀결은, 아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표면화되겠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로서, 자신의 인생을 조금 접고, 아이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삶을 조금 더 길게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5~6학년 때 종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아이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안돼, 하지마, 뭐하는 짓이야, 그만 둬, 그만 해, 때려 쳐... 이런 말을 늘상 들으면서 살아가는 아이에게, 또 한 번의 금지어가 큰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요즘 저희 첫째 아이와 지내면서 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사실 별 생각 없이 - 너무 많은 생각 끝에 - 저희 첫째 아이를 그저 허용하면서 지켜봐 왔는데, 중학교에 올라가고,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 할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요 근래에 아이에게 했던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태도와 자세를 잃지 마라, 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수업 시간에 눕는 아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너는 그러면 안 된다, 는 이야기를 강력하게 했습니다. 집에서는 공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그만이지만, 학교에서 그런 자세와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잔소리를 조금 길게 했죠. 왜 수업 태도와 자세가 중요한지, 그것이 스스로의 성실함을 어떻게 입증하는 것인지에 대해. 저희 아이는, 아빠, 난 안 자, 너무 졸리면 꾸벅꾸벅 졸지만, 그래도 자려고 눕진 않아, 라고 말하더군요.
지난 주엔가는, 오픈카톡은 줄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카톡에 오래 몰두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에 몰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니, 차라리 핸드폰의 다른 기능을 이용할지언정, 카톡만 붙들고 있지는 말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카톡 알람을 껐다고, 엊그제 그리 말하더군요.
기본적으로 허용하되, 약간의 제약을 두는 방식. 저희 아이들과 저희 부부가 크게 갈등할 일이 없는 이유가 되어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집에 들어와서 잘 때까지 핸드폰을 들여다봐도 뭐라고 안 하는데, 한 두 가지 핸드폰 사용에 대한 제한점을 말한다고 그것 때문에 속상하고 힘들고 화 낼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이게 가능한 이유가, 어떻게든 저희 부부가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공간을 점유하고 함께 무언가를 해 나가려는 마음가짐을 실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2학년 짜리는 아직도, 막내 동생 친구들 캠핑갈 때 따라가고 싶어하고, 아빠 엄마 커피 마시러 갈 때 뭐 재미있는 거 있을까 싶어 따라오려고 합니다. 데리고 가야죠. 시간을 같이 보내야죠.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가야, 원-포인트 레슨도 할 수 있습니다.
집에 누워 있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고 학원으로 내돌리면, 아이에게 정작 해 주어야 할 말을 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불만을 쌓아가지만, 일상적인 대화의 방법을 놓치기 때문에 아이에게 이야기 할 시점을 계속 미뤄가면서 불만만 쌓아가게 되죠. 그러다가 더 이상 쌓을 수 없어 폭발하는 지점이 생기는데, 그게 아이에게는 뜬금없는 지점이 되는 셈입니다. 지금까지는 별 말 없다가, 왜 갑자기 저렇게 크게 화를? 아이는 이성적으로 부모의 불만에 접근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 때 그 때 비우려면, 항상 함께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냥 있으면 뻘쭘하니까, 아이들을 부모의 삶의 자꾸 함께 하도록 해야 합니다. 큰 이벤트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소한 삶의 공유가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던지는 원-포인트 레슨은, 소소한 일상의 공간에서 그 때 그 때 던져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학부모님들이, 내 아이를 알아가는 시간을 자꾸 방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노력하고 애써도 아이들을 이해하고 알아가며 적절한 순간에 아이들에게 격려하고 조언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내 아이는 크고 자라고 성장하며 변해갑니다. 그 어느 시점엔가 아이의 변화를 놓치는 순간, 이제 아이의 삶으로부터 영영 분리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아이의 성장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아이를 놓아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의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초등학교 1, 2학년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학생이 되면 아이의 손을 놓아도 될까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할 마음이 막 솟구친다면, 아직 아이를 놓아야 할 시점에 도달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아이를 놓지 않으시면 됩니다. 아이를 알아가는 시간을 계속 가지시면 됩니다. 내 아이에게는 지금, 그것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