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온작품읽기] 시간가게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
지금 아이들은 [시간가게]를 5학년 때 온작품읽기로 이미 다 읽은 아이들입니다. 교사의 생각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아무래도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이 책을 골랐지만,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이었던 듯 싶습니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거나 많이 한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좋았다, 지루했다.
좋았다, 라는 평가는 아마도 책 읽기 자체를 즐겁게 여기는 학생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루했다, 는 친구들은 어떤 책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이겠지요. 둘은 큰 편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어른들도 '다시읽기'를 그렇게 썩 즐기진 않는 편입니다. 저도 다시읽기를 조금씩 시도하게 된 것이 채 3년이 되지 않는 듯 합니다. 그 묘미와 맛을 알아가는 것은, 그저 취향의 문제이지 독서 수준의 문제는 아니니, 아이들에게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가게]는 5학년이 읽는게 맞습니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5학년이니까요. 그래서 작년 5학년 선생님들이 이 책을 골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시간가게]가 던지는 문제 의식은 5학년 아이들에게 가서 닿을 것인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은 너무나도 바쁜, 그러면서 성과를 요구받는 아이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실입니다. 딱 읽으면 강남 아이들이 생각나는. 그런데, 이 책이 씌여질 때와 지금의 상황은 미묘하게 틀어졌습니다. 성적으로 지원하던 국제고는 1차 전형을 추첨으로 바꾼지 오래이며, 요즘의 초등학교에서는 점차 서열화하기 편리한 방식의 평가가 아닌, 개인의 성취를 확인하는 절대평가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경험으로는 제 학생 중 3분의 1~4분의 1 정도가 초등학교 수준에서 사교육을 받지 않는 것을 겪어왔습니다. 지역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책의 문제 의식은 여기에서부터 미묘하게 틀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책을 통해 얻어내는 것도 조금 틀어집니다. 사실, 이 책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취와 성공을 위해 행복한 기억들을 소진해버리는 윤아. 그리고 성취와 성공이 새로운 행복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얻은 성취의 기쁨으로 10분의 시간을 살 수 없는 것을 윤아는 경험하면서, 결국 행복이란 개인의 성취와 성공보다, 관계 속에서 얻고 누리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윤아에게 공감하지 못함으로써 - 윤아처럼 시달리거나 강요당하지 않기 때문에 - 이야기가 던지는 메시지는 허공에 뿌려져 버립니다.
현실에 닿아있는 이야기가 힘을 잃을 때는, 더 이상 이야기가 현실을 비취지 못할 때입니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참 좋아하지만... 그리고 아직 이야기가 현실에 닿아있다고 저는 생각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이제 [난쏘공]을 70년대 시대 상황을 비추이는 '추억의 명작' 정도로 보는 듯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사의 질문에 저희 반 아이 하나는, 생각하기도 싫다면서, 이딴거? 물어보지 마요... 라고 메모를 달아놓았네요. (쿨럭) 가서 이야기 해 줄 생각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이런거, 라고 해야한단다... (쿨럭쿨럭)
이 책은 5학년 아이들에게 가서 닿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이 기반한 문제 의식이 현실과 미묘하게 틀어져버리고 있으며, 따라서 책이 독자에게 가서 닿기를 바라는 메시지도 흐릿해져 버리고 있습니다.
결국, 이 책은 5학년에게도, 6학년에게도 그 효용이 무뎌져 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남은 것은 이야깃거리 뿐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장치에 집중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이들 중 많은 수가 '맨 처음 시계를 얻게 된 것'과 '시계를 밟아버린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환상적인 이야기에서 독자가 그저 환상에 집중한다면 메시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이야기의 겉껍데기인 극 중 장치만 남게 됩니다. 아마 작가도 독자의 이런 모습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주인공인 윤아에게 가 닿기 어려운 변화된 현실 속에 살면서, 윤아가 몰입하고 몰두하는 시계의 필요성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는 것은 행복한 기억을 팔아 10분을 더 얻는 것, 그리고 시계를 부숴버리는 이야깃 속 이벤트만 남는 것이죠.
그러면서 몇몇 아이들은 윤아에게 공감하고 있지만, 윤아의 행복관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윤아처럼 바쁜 자신의 삶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남이 뒤섞여 든 행복의 기억 속에서, 윤아가 한 주체적인 선택에 대한 공감은 없이, 표피적인 현상에만 공감을 드러내는 아이들의 독서. 책이 지닌 문제 의식이 이제 아이들에게 가 닿기 어려운 것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금새 힘을 잃어버린 까닭을, 저는 서사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 많은 생각거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짧게 이야기하였지만, [시간가게]의 가장 큰 악덕은, 윤아를 둘러싼 갈등 관계에 소홀했다는 것을 들고 싶습니다.
윤아와 엄마의 갈등관계는 이 사건의 핵심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등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결코 표면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사는 윤아. 그리고 그 삶을 힘들어하고 벅차하는 윤아. 그러나 결코 엄마와의 부딪힘은 없습니다. 그저 엄마의 뜻에 이끌려 수동적인 삶을 살아내다가 만나는 시간가게. 엄마가 원하는 삶을 이루어내기 위해 선택하는 10분의 여윳시간. 그리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그저 받아들이고 누리는 윤아의 모습.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조금 더 가 닿으려면, 윤아와 엄마의 갈등이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한 고민보다는, 엄마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고민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환상의 장치를 이야깃 속에 끌어올 때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은, 결국 이야기가 주는 생각거리가 독자에게 가 닿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이야기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이야깃거리만 가 닿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시간을 더 가질 수 있다는 장치가 이야기에 더하는 매력에 휘둘려,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면적이고 표면적인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 중에 윤아의 수동성은, 주체적인 결단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되찾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지지받는 인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야깃 속 모든 갈등 - 윤아와 엄마, 윤아와 수영/미라, 영훈과 영훈 엄마 - 은 모두 평면적으로 존재할 뿐이고 - 영훈의 말 속에서 영훈도 시간가게에서 시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실마리, 그리고 그를 통해 영훈과 영훈 엄마의 갈등 관계가 전환점을 거쳐 극적으로 해소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영훈이와 관련된 서사의 양이 너무 작습니다 - 모든 인물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수동적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이야깃 속 교사마저도, 평가와 점수 앞에서 무기력하게 지나가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교사가 그렇게 평가 앞에서 수동적이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시간가게]는 6학년 2학기 1단원과 5단원을 통합하여 구성한 '작품 안팎에서 만나는 인물의 생각' 단원에서, 지금까지 배운 '이야기와 주장 속에 담긴 인물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작품 속에서 발견하여 보기 위한 제재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통하여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자기주도적인 결정이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삶의 가치로 여기게 되길 의욕하였으나, 이야기의 서사가 아이들에게 가 닿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들의 활동 결과물로 알 수 있었으며, 아이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정의내리고 규정하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교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교사가 '이 작품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이라고 안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배움은 평가나 시험에서 옳은 답을 쓰기 위한 배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움이 필요해지는 시점에서 그렇게 배우면 됩니다. 지금의 학교는, 극 중 윤아가 살아가는 학교 공간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쟁과 배제의 원리가 아닌, 관계와 어우러짐의 원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시간가게]를 읽혔지만, 이제 이 책은 '예전 초등학교가 이렇게 빡센 평가를 통해 아이들을 줄세웠었지'라는 의미로써 유효할 뿐,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하기에는 어려운 책이 되었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펼쳐 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물론, 메시지에 가 닿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공간에서의 배움은 더 많은 아이들이 메시지에 가 닿아야 하고, 서로의 감상과 느낌을 이야기할 때 공감으로 서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내면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로 읽어볼만한 책이지만, 교실에서 온작품읽기로 읽기에는 어떤 성취기준을 염두에 두고 읽혀야할지 잘 와 닿지 않는 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