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제부터 학원인가.
언제부터 학원인가.
중학교 교실에서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을 조사해보면 거의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니, 하나 둘이나 될까.
평범한 수도권 신도시의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는 예닐곱 명 정도가 학원을 다니지 않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6학년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모두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는 것이죠.
결국 대부분 학생들이 학원이든 과외든 사교육에 머물기 시작하는 시점은 중학교 진학 전후가 마지노선인 듯 합니다.
이 중에서 일찍 시작하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인 경우도 있는 듯 합니다. 열기가 뜨거운 동네에서는 예비 초1반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이렇게 일찍 시작하는 아이들은 당연하겠지만 두 경로로 나아갑니다. 높은 성취수준을 보이는 아이들과 (처음에는 높았지만 점차 또는 처음부터) 낮은 성취수준을 보이는 아이들로 나뉘는 것이죠.
일견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이렇게 일찍 시작하여 높은 성취수준을 보이는 아이들이 겉으로 돋보입니다. 발표를 해도 조금은 더 똑똑한 소리를 하는 아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래도 일찍부터 높은 성취수준을 유지하였던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사교육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사교육 없이 학교 수업이 핵심인 아이들은 대부분 수업 시간에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성격이 활발한 아이들이더라도 수업 시간에는 조용함을 유지하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한 번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다루는 것과 처음 배우는 생소함에 반응하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 드러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배움을 평가하는 지점에 들어서면, 조금 다른 양상을 마주하게 되긴 합니다. 요즘 초등학교 평가는 그 결과를 정형화된 수치로 드러내기 어려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평균 등의 수치로 명확하게 표시하기 어렵지만, 2018년도의 저희 반 아이들을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에 따른 평가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높은 성취 수준을 보인 아이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아이들은 모두 사교육을 받지 않거나, 6학년 올라와서 영수 학원을 아예 끊어버린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명한 아이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평가를 출제하는 주체가 담임 교사이고, 담임 교사와 배운 내용이 평가 요소라고 할 때, 이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하여 배운 것이 아무래도 좋은 성취를 거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자면, 저희 반 아이들 중에 수업 시간에 조금은 더 똑똑한 소리를 하는 아이들의 성취 수준은, 제가 가지고 있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학부모께서 상담에 찾아오셨길래 이런 이야기를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학급들이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별한 학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성취 수준이 수치로 표시되던 시절에도, 제가 맡고 있던 학급에서 가장 높은 성취 수준을 보이는 세 손가락에는 항상 사교육을 받지 않던 아이들이 꼭 한 손가락 또는 두 손가락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른 사교육은 일찍 배우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배움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만들기도 하지만 과도한 과제 때문에 수업 집중력을 잃게 만들기도 하는 단점도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위 이야기는 이른 사교육이 잘 되었을 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학자 로크는 'tabla rasa 타불라 라사'라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우리 마음은 빈 서판,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와 같은 상태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인식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른 사교육을 시작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로도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로크의 인식론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지만) 아이들의 빈 서판에, 부모가, 어른들이 자꾸 이런저런 흔적들을 남기면서 그 백지는 조금씩 때가 탑니다. 또 꼭 연필로 쓰지 않고 볼펜으로 흔적을 남기곤 합니다. 연필로 쓴 글씨를 지워도 흔적이 남는데, 지워지지도 않는 볼펜으로 남긴 흔적들. 보존할 가치가 있는 흔적이라면 마치 비석에 음각하듯 마음 속에 새겨 넣겠지만, 아이와 맞지 않는 흔적인 경우에는 그 생채기가 오래오래 가곤 합니다.
그리고 아직 자기 것 - 자기 생각, 자기 가치관, 자기 습관, 자기 주도적 마음가짐 등등등 - 이 없는 아이들에 이런 어른들의 흔적은, 둘 중 하나가 됩니다. 자연스럽게 가치관의 일면에 자리잡던지, 아니면 아예 반대편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던지.
만약 어른이 쓴 글씨가 '성실', '책임감', '배려', '정의' 이런 것이라면... 사실 이런 것이라도 아이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고 사는 경우, 결국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뿌리깊은 내적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닌, 공부와 학습에 대한 것이라면...
이미 아이의 마음 속에 이런저런 흔적을 남겼는데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면, 이를 마치 아무 것도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입시생을 주로 가르치던 시절, 가장 어려운 아이들은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건드려놔서 어떻게 가르치고 지도해도 무기력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한 번, 아는 집에 대입 원서를 쓰는 아이 때문에 불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점수 때문에 실망 가득하여 아이를 질책하고 있고,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죄인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를 다른 방으로 불러내어, 권했습니다. 한 해만 더 해보자. 아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다시는 영어 수학으로 시달리고 싶지 않다고 말이죠.
이 아이는 결국 독학사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습니다. 4년 과정인데, 한 학기에 40학점 수업을 들으면서 2년만에 학위를 받는 그런 커리큘럼이었습니다. 스무 살 이 아이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영어 학원에 가서 토익 수업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아홉 시에 강의장에 가서는 저녁 여섯 시까지 하루 여덟 시간씩 강의를 듣고, 그 후 저녁에는 열 한 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런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던지... 어느 날 그 아이에게 한 마디 건네었습니다. 으아... 지금 사는 것처럼 그렇게 대입 공부를 하면 서울대 아니라 서울대 할아버지라도 만나겠다.
그런데 싫은 것입니다. 잘 되지 않는 아이들이 주로 마주하는 감정은, 싫다 혹은 지긋지긋하다, 입니다. 어릴 적에는 잘 모릅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바쁘게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정도도 실은 어린 편입니다. 여자 아이들은 책임감으로 이것을 꾸역꾸역 버티지만 왜 이걸 하는지는 잘 모른 상태로 버팁니다. 그나마 성취수준이 높은 아이들은 그걸 자양분으로 버팁니다. 그런데 잘 나오지 않는 아이들은 그저 조금씩 손을 놓아갑니다. 과도한 과제가 지속적으로 부여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높은 성취수준이 주는 자부심이 있는 아이들은 그것을 토대로 그럭저럭 버텨내지만, 이걸 해서 무엇하나 생각하는 아이들은 점점 인터넷 검색으로 눈을 돌립니다. 무슨무슨 문제집 답안지 공유점요. 한 두 문제 풀고 나머지는 모조리 별표. 그리고 학원에 가서 말합니다. 나머지는 모르겠어요.
학원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시켜도 의미없다고 말해주지 않고,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려야한다고 조언하지 않고, 아이의 탓으로 돌립니다. 아이가 꾸준하게 하지 않아요. 아이가 과제를 대충해요. 집에서 과제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학원에서 잡고 시켜도 문제입니다. 과제는 과도하고, 아이는 자신의 성취에 대한 자신감이나 기대도 없는데, 학원에 앉아서 억지로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결국 아이의 낮은 성취 수준에 학부모는 다른 학원을 알아보고, 용한 과외 선생을 수소문하지만, 결국 그렇게 그렇게 시간을 지내게되고, 아이는 계속 마음 속 백지에 알 듯 모를 듯한 메시지만 더하여 가게 됩니다.
물론 사교육 같은 것을 안하는 덕에 낮은 성취 수준을 보이고, 그것대로 또 실망하고 낙심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못 한다는 낮은 자존감만 있을 뿐이지, 해도 안 된다는 무수한 실패의 감정은 없습니다. 차라리 늦게 투입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의 투입은, 아이의 강점이나 장점에 대한 이해없이 어른 마음대로 그려나가는 지울 수 없는 마음 속 백지 위의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못 한다는 그 감정 뒤에 도사린, 잘 해 보고 싶다는 도전의식을 캐치하고, 어느 정도 컸기 때문에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장점이나 강점에 걸맞는 방법을 투입하여 단번의 성공을 꾀해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못 한다는 감정 뒤에는 그래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잡을 여지가 있지만, 해도 안된다는 감정 뒤에는 어떤 도전적인 생각도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그저 피하고만 싶을 뿐.
더 안타까운 사례는, 그렇게나 열심히 하는데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떨어지는 아이들을 볼 때 입니다.
입시생을 가르칠 때, 어떤 아이들은 그렇게나 열심히 하는데도 꼭 너댓개씩 틀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수를 하던, 잘 모르던, 여하튼, 하는 공부량에 비해 항상 성취는 조금씩 아쉬운...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몸에 밴 공부 방식이 자기와 맞는 방식이 아닌데,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두려움도 크고 익숙함에 머물려는 생각도 크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아마도 일찍 시작했을 가능성이 훨씬 큰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해도해도 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점점 자존감이 떨어져가는 것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아마 자신의 성취에 큰 자부심이 있었겠지만, 성장의 정체를 겪으면서, 그럼에도 너무 빨리 익힌 (자기 것으로 체화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자동화되어버린) 방법의 개선은 엄두도 못낸 채 점점 침잠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이 마음 속 백지 위에 음각되어 새겨진 아이들. 차라리 빈 백지가 낫다, 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빨리 시작해서 앞서가고 잘 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그러나 그것이 빨리 시작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잘 맞는 것을 찾았기 때문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관점을 전환해 볼 때, 차라리 늦게 시작해서 바로 자신의 것을 찾는 것이, 빨리 시작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6학년은, 결코 늦은 시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빠르다면 빠른 시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 지론 중에, 아이들의 인생은 열 두 살 부터이다, 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쯤 되어야, 평균적으로 자기 생각이 생기고 자신의 판단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기 시작하고, 부모의 혹은 어른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 평가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되는대로 살아왔는데, 이 시기부터 스스로 무언가를 자꾸 고민하고 찾아보고 시도하기 시작합니다. 한 1년 정도 그렇게 탐색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원에 다니게 되고, 과도한 과제에 치여 탐색하기를 멈추는 삶. 그러니 문제가 생겼을 때 무언가를 개선하려는 마음가짐이 쉽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탐색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빠른 탐색 종료는, 아이에게도 좋지 않고, 부모님께도 좋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찍 시작한 아이 중, 그 여세를 몰아 끝까지 잘 하는 아이들은 정말 극소수입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조금씩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늦게 시작한 아이 중에, 일찍 시작한 아이만큼의 성취 수준에 금새 도달하여 그 수준을 유지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케이스가 워낙 작아서 우리가 잘 찾지 못하는 것일 뿐.
왕도는 일찍 시작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