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선생님 #7. 사춘기 자식은 처음이라
아이가 커버렸다. 잘 때를 제외하고는 매 순간 내 따뜻한 눈길과 손길, 보살핌이 필요했던 아이가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쑥 자라버렸다. 놀이터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고, 인형 놀이하자며 나를 붙들어 앉히던 아가는 이제 없다. 그 작던 아가는 이제 침대에 누워 “엄마 왔어?”라는 말로 퇴근한 나를 반기는 사춘기 밉상 청소년이 되었다. 그 청소년은 잠시 후 한 마디 덧붙인다. “엄마, 카트 한 판 고고?” 그러다 또 느닷없이 안아달라며 엉겨 붙는다. 당하는 나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 지 모르겠다.
사춘기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불안하다고 한다. 갑자기 커버린 몸이, 그토록 사랑했던 부모로부터 이제는 조금 떨어져 나가고 싶은 마음이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 역시 자식과 함께 흔들리는 것 같다. 아이가 어릴 때처럼 계속 사랑스럽고 예쁘길 바라는 마음과 커버린 아이를 나에게서 분리해야 하는 마음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다른 부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그리고 그 불안함을 제대로 감당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반성하는 요즘이다.
아직 완전히 2차 성징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딸 아이 몸이 부쩍 크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들어 제대로 시작이라는 걸 안 한 탓인지 캐릭터가 오락가락한다. 뭐하냐는 내 문자에 ‘TV 봄’, 밥 먹었냐는 메시지에 ‘ㅇㅇ’할 땐 언제고, 내가 강아지 좀 쓰다듬을라치면 자기도 쓰다듬어 달라고 달려든다. 강아지에게 “우리 구름이는 어떻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하면 자기랑 구름이 중에 누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냐고 묻는다. 이럴 때 내가 반응하는 꼴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딸 아이의 시크한 문자를 받으면 괜히 신경이 쓰인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싶어 슬쩍 건드려 보고 싶어진다. 문자 답 좀 따뜻하게 해달라 보채거나, 이모티콘이라도 하나 써달라고 징징거린다. 딸 아이는 귀찮은지 읽고 씹어 버리거나 ‘헐’이라는 한 마디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한 바가지 욕하고 말아 버린다. 문제는 반대 상황이다. 강아지를 질투하고, 뽀뽀해달라 보채는 두 번째 캐릭터의 딸 아이에게 나는 그만 세상 차가운 엄마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아우, 그만해.”, “그래 너도 귀여웠지. 구름이는 지금 귀엽고.” 사춘기 딸 아이 비위 하나 맞춰주지 못하는 철없는 엄마다.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였으면 하는 마음과 이제 13살이나 되었으니 좀 어른스러웠으면 하는 마음이 매일 같이 부딪친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 특히 사춘기 딸 아이 엄마는 처음이라 많이 서툴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중심을 잡으려 노력은 해본다.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우리 딸이 너무 크게 아프지 말고 헤쳐나가길 기도한다. 제 입으로 엄마는 사납다고 팩트 폭격을 날리는 딸이 그 사나운 엄마에게서 안전하게 분리되길 간절히 빈다.
나이가 들면서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 상처 난 자리에 붙어있던 딱지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똑 떨어지면 그 자리에는 선홍빛 새살과 함께 반드시 옅은 상처가 남는다.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면 상처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고, 그렇다고 그 딱지를 평생 붙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딱지가 예쁘게 떨어져 나가면 연하게 흉 져서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문질문질하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우리 딸이 나에게서 그렇게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다. 내 살 같고 피 같던 딸을 겨우 딱지에 빗대서 미안하지만,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덜 상처 받고 서로 흉지지 말고 아름답게 이별하면 좋겠다.
어젯밤에는 으르렁거리고 오늘 아침에는 자는 딸 아이 얼굴에다 뽀뽀하고 나왔다. 나란 인간이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그리고 사춘기란 도대체 뭘까 고민하다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신기하게도, 그 소중하다던 우리 딸은 딱지고, 이왕 떨어질거면 나한테 상처를 덜 남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속 저 깊은 곳 내 진심이 나도 모르게 드러난 글이 되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사춘기 자식을 둔 엄마는 이렇게나 불안한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