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세이]나의 무의식은 말했지, '밥값을 해라, 주인놈아.'
"선생님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잖아요. 선생님이 뭘 가르친다고 그러세요!!!"
태석이가 여우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만 얼어버렸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태석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성대가 딱딱하게 굳어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애써 화난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마을 어귀에 세워 놓은 정승만도 못했다. 그새 의기양양해진 태석이는 고래 고래 목청을 높였다.
"선생님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을 떠보니 익숙한 나의 공간이었다. 어리둥절하여 주의를 둘러보았다. 동향인 방안 가득 햇살이 들어와 있는 걸 보니 새벽 6시쯤이라 추측했다.
악몽을 꾼 것이었다.
하..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창문을 닫지 못하고 잔 때문인지, 악몽 때문인지 저릿한 두통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꿈이었을까.
꿈 내용을 복기해보았다. 생생한 꿈에 복선인가 싶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프로 불안쟁이인 나지만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쓸데없는 불안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프로이드의 관점에 따라 자가 꿈 분석을 해보기로 했다.
왜 태석이였을까.
태석이를 떠올렸다. 학기초엔 긍정 에너지를 뿜뿜 뿜으며 묵묵히 선생님을 도와주고 친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따뜻하고 바람직한 아이였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아이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주 짜증과 분노에 휩싸이고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벼운 게임인데도 지면 같은 편 친구를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거나 분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고이기도 했는데, 친구들에게 보이는 것은 창피한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애써 눈물을 감추기도 했다. 심지어는 나에게까지 버릇없게 행동하여 지적을 받기도 했다.
3-4월까지만 해도 바르고 선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였는데 언제부터인지 가장 신경 쓰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6학년 학부모 상담을 할 때 자주 듣게 되는 "우리 애가 사춘기가 오더니 눈빛부터 달라졌어요. 우리 애 같지가 않아요."라는 말이 딱 요즘의 태석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다.
학기 초 긴장이 풀려서는 아닌 듯 하다.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도 조절되지 않을 정도로 격해지는 것에 아이 스스로도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태석이에게 도움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태석이의 분노와 부정적 감정의 근원을 찾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태석이의 감정 변화를 아이들과 공유하고 공감, 수용하며 격한 감정을 부드럽게 해소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태석이 본성 자체가 순해서 "야, 김태석." "그만"이라고 하면 수그러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드러나는 심각한 갈등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진도가 밀려있기도하고, 남겨서 상담하면 애기가 싫어할 것 같기도 하고(나도 그건 싫고)... 핑계를 대자면 끝이 없었다.
그러는동안 나의 무의식은 주인놈을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고 참다 못해 꿈을 통해 신호를 보내왔나보다.
'미루지 말고 밥값을 해라 주인놈아.'
자가 꿈분석을 마치니 흐릿하던 것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회피하지 않아야 겠다. 다시 한 번 교사이자 상담가인 나의 존재감을 십분 발휘해보겠노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쌓인 책들을 구석에 밀어두고 의욕적으로 수첩을 펼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펜대를 굴리며 다가올 월요일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우리 태석이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 빠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우선 태석이와 개인상담을 통해
요즘 생활은 어떤지, 내가 관찰한 부분에 대해서 태석이도 맞다고 생각하는지, 태석이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선생님이 도와줄 부분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얘기를 나눌것이다.
그리고 태석이가 겪는 감정변화가 사춘기의 한 양상이며 호르몬의 변화 때문임을 알려주고
학급 아이들 전체와 사춘기 때 겪는 감정변화에 대해 태석이의 경험을 공유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 한다.
태석이의 동의를 구한다면 토크쇼 '난 겪고 있다 사춘기!'컨셉으로 학급 아이들과 태석이의 경험을 공유하며 아이들이 태석이의 감정을 수용해주도록 하고 사춘기의 격한 감정 변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려고 한다.
그 다음엔 미리 계획했던 세번째 수용수업 '감정 받아들이기'수업까지 하면!!
완.벽.
악몽에서 깨어나자마자는 불안하고 찝찝했는데
이렇게 (나에겐) 완벽한 계획을 짜고 나니 '역시 나는 짱이구나.' 자만감이 들었다. 그새 두통도 말끔해졌다.
월요일에 순탄하게 적용되기를 바래본다.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땐 '요것들이 나의 존재감을 발휘하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려 한다. 가끔 귀찮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성내봤자 뭐하겠는가. 좋게 좋게 생각해야 병 안 걸린다.
여담이지만 가끔 교사도 누군가가 마구마구 칭찬 해줬음 좋겠다. 고래는 아니지만 칭찬받으면 기분좋으니깐.
아무도 칭찬 안해주니까 나라도 칭찬해줘야지
아, 진짜 나는 짱인듯.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모두 짱입니다!!)
+완벽한 계획에 대한 완벽하지 않은 후기
월요일 아침 시간에 "사랑하는 태석아.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할까~?"하고 태석이를 불러 개인상담을 진행했습니다.(다른 아이들은 "반장, 떠든 사람 이름 적어줘. 소리 내면 남는다."는 협박으로 관리했습니다.) 태석이는 제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을 들으며 수줍어 하더라구요. 짜증과 스트레스의 근원으로는 영어학원을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서 자신의 속내를 부모님께 별로 말씀드리지 않는다고 했고요. 그러다보니 해결은 되지 않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점점 커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저와 함께 개선책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태석이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니 스스로 감정은 조절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부정적 감정을 격하게 표출하는 것은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신 짜증이 많이 날때 "선생님, 저 지금 짜증난 상태에요."라고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상담은 생각보다 순조롭고 훈훈하게 흘러갔습니다. 교실로 돌아와 왜 태석이랑만 개인상담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아이들에게(저희반 애들은 상담을 무척 하고 싶어합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학원이 힘든 것에 스트레스받는 태석이에게 격한 공감을 해주었고 태석이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태석이 어머님께도 전체적인 상황을 전화로 전달해드렸구요~
오늘 일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꺼내고 공유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에겐 '미루지 말어라, 이것아.' 라는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